가을이 더 아름다운 곳, '섬 속의 절' 청평사
가을 아침, 낮게 깔린 물안개가 도시 전체를 휘감는다. 일교차가 커 안개가 쉽게 생기는 가을이면 춘천은 어김없이 안개로 자욱하다. '강과 호수에 둘러싸인 분지'인 지형적 특징으로 '안개의 도시'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아침에 안개가 끼면 오후는 맑다"는 속담처럼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면 자욱한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눈부신 가을 햇살이 도시를 채운다.
안개가 짙게 낀 출근길, 유난히 짙은 안개를 보고 오늘 날씨는 분명 맑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하면 '청평사'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왕 간다면 맑은 가을날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가고 싶었다.
청평사에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46번 국도를 타고 화천 배후령을 넘어가는 육로 코스, 다른 한 가지는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직접 운전해 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꼭 배를 타고 가고 싶었다. 육로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렇게 까지 미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배'는 낯선 교통수단이었기에 그동안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양강댐까지는 몇 번 갔었지만, 청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퇴근하자마자 소양강댐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한산했다. 소양강댐에서 청평사 가는 배는 09:30부터 17:00까지 30분 간격으로 있다. (반대로 청평사에서 소양강댐으로 돌아오는 배는 10:00부터 17:30까지 30분 간격으로 있다. 요금은 왕복 6천 원.)
승선권을 끊고 배에 탑승한다. 선장님이 배에 시동을 걸자 매캐한 기름 냄새가 올라온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청평사는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로 15분이면 닿는다. 멀미를 할 만큼 너무 길지도, 뱃값이 아쉬울 만큼 너무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소양호의 풍경을 즐기다 보면 금세 도착한다.
[TRAVEL TIP] 소양강댐 선착장
소양강댐 선착장까지는 춘천역에서 11번, 12번, 15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소양강댐(종점)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차량을 이용할 경우에는 소양강댐 1~3 주차장, 혹은 선착장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선착장 주차장 -> 3 주차장 -> 2 주차장 -> 1 주차장 순으로 선착장에서 가깝다. 주차요금은 없다.
소양강댐에서 청평사로 가는 배는 09:30부터 17:00까지 30분 간격으로 있다. 반대로 청평사에서 소양강댐으로 돌아오는 배는 10:00부터 17:30까지 30분 간격으로 있다. 요금은 왕복 6천 원. 주말에는 수시로 운영한다. (전화번호 : 033-242-2455, 소양관광개발)
청평사 선착장에 닻을 내리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울긋불긋 가을의 색을 입은 산세가 참 예쁘다. 산 아래쪽으로는 고소한 감자전 향기가 가득한 사하촌(寺下村)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면 청평사 입구까지 계곡길이 이어진다.
청평사는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오랜 사찰이다. 시원(始原)을 쫓아보면 고려시대에까지 이르는 고찰이지만, 지금은 관광지나 데이트 코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80~90년대 청평사는 386세대의 연인들이 당일치기로 가기 딱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경춘선을 타고 아침 일찍 떠나 하루 동안 놀다 올 수 있는, 하지만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에 교통편이 끊긴다면 의도치 않게 (누군가는 의도했겠지만) 하룻밤 머물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육로가 생겨 어떻게든 시내로 나올 수 있지만.
[TRAVEL TIP] 청평사
춘천을 대표하는 관광지. 소양호 한쪽에 우뚝 솟아 있는 오봉산 기슭에 자리한 청평사는 고려 광종(973년)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명종 때 보우 선사가 중건, 대사찰이 되었다. 현재는 보물 164호인 회전문과 3층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청평사는 소양강댐이 생긴 이후로 더욱 유명해졌다. 소양강댐에서 배로 15분 걸리는 '섬 속의 절'이다. 입장료는 2천 원. 사하촌에서 청평사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험하지 않아 가벼운 옷차림과 운동화만으로도 다녀올 수 있다. 시간은 넉넉하게 왕복 1시간 ~ 1시간 30분(약 4km) 정도. 이밖에도 구성폭포와 청평사 계곡 등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민가들을 벗어나면 길은 숲 속으로 가까워진다. 청평사의 숲은 어느새 노란 옷을 입었다. 개울을 오른쪽으로 하고 천천히 걷는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부스럭대는 낙엽 밟는 소리가 낭만적이다. 이런 길을 걸으면 엄마가 생각난다. 소녀 감성의 엄마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낙엽을 만져보거나, 새소리에 귀 기울였다가 들꽃에도 말을 걸었을 것이다. 짧은 가을이 가기 전에 엄마를 춘천으로 초대했지만 다른 일정에 오시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 아름다운 계절이 끝나 버리기 전에 꼭 한 번 춘천에 오셨으면 싶다.
가을이 되니 이런저런 소식이 많다. 연이어 들려오는 친구의 결혼 소식에 나는 주말마다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실연을 당했거나, 퇴사를 했으며, 결코 만만치 않은 육아 전선에 뛰어들고 있었다. 또 최근엔 춘천에서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다른 도시로 이직하게 됐다. 정말 많이 아쉽지만 그의 꽃길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바뀌어간다.
발걸음을 재촉하자 경쾌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높이 9m에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다. 길게 드리운 가을 나무들 사이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절경이다. 봉화산의 구곡폭포가 웅장하고, 삼악산 자락의 등선폭포가 신비롭다면, 오봉산의 구성폭포는 고상하다.
구성폭포에는 중국 당나라 공주와 상삿뱀과의 사랑이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중국 원나라 순제는 상삿뱀이 붙어 고생하던 자신의 공주가 청평사에 와서 불공을 드리자 상삿뱀이 떨어져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구성폭포 위에 공주 탑을 지었다고 하며, 공주가 기거하던 굴은 공주굴, 목욕재계하던 계곡탕은 공주탕이 되었다고 한다. 폭포수를 따라가면 공주 탑, 공주굴, 공주탕을 볼 수 있다.
숲을 지나면 오봉산 봉우리가 선명하게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청평사가 있다. 청평사엔 많은 문화재가 있었지만 극락전을 비롯한 유적들이 6·25 전쟁으로 소실됐고 보물로 지정된 '회전문(廻轉門)'만이 남아 있다. 회전문은 빙글빙글 돌아서 들어가는 문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절에서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이다.
절을 찾으면 기와불사를 유심히 본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라는 문구가 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음에 감사한다. 기와불사에 쓰인 저마다의 소원을 읽다 보면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몸과 마음의 찌든 때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든다. 글씨체는 다르지만 소원은 비슷비슷하다. 가족 건강, 학업 성취, 행복 등 이곳에서 기도하는 중생들의 마음은 다 비슷하리라.
부디 모두,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Everyday is a good day for your life!
청평사를 둘러보고 내려온 사하촌(寺下村). 가게마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막국수에 감자전까지 주문했다. 혼자 먹기에도 부담 없는 분위기라 좋았다. 양이 많아 먹다 남은 감자전은 포장해 왔지만.
[TRAVEL TIP] 부용산장가든
춘천 사람들은 청평사에 "먹으러 간다"고들 하는데 그만큼 맛 좋은 토속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청평사 사하촌에는 많다. 그중에서도 '부용산장'은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빙어튀김, 산채비빔밥, 감자전, 메밀전병, 막국수, 도토리묵 등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도는 춘천의 토속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혼자 방문해도 부담 없는 분위기이며, 여럿이 방문한다면 '쟁반막국수'를 추천한다. 막국수 7천 원. 감자전 1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