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秒)'까지 섬세하게 다루는 '시간 밀당의 고수'들
새해를 맞아 춘천 지역 아나운서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근무 시간이 제각각이라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지만, 간신히 맞춘 시간이기에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근황 토크 삼매경에 빠진 것도 잠시, 누군가의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식당의 소음을 압도할 만큼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듣고 동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는데, 아마 모두 그 상황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나운서 모임에서 휘황찬란한 알람 소리를 적어도 한 번은 듣게 된다. 이는 대부분 생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소리다. 정해진 시간에 생방송을 진행해야 하다 보니 스마트폰에는 시간대별로 맞춰진 알람으로 가득하다. 기상 시간을 알리는 알람부터, 7시 TV 뉴스, 9시 30분 TV 뉴스, 12시 라디오 뉴스 등등 알람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다. 방송 시간에 늦거나 잊지 않도록 나름의 조치를 해둔 것이다. 방송 스케줄을 알람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일부 방송국에는 진행자들에게 방송 시간을 문자로 알려주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그런 시스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들도 시간에 예민한 것은 마찬가지 일 터이다.)
시간에 예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은 없을 테지만, 아나운서는 유독 시간에 민감하다. 특히 생방송을 진행할 때는 약속된 시간에 방송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진행 중에도 '시(時)'와 '분(分)'을 넘어 '초(秒)'까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1초의 실수도 방송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아나운서는 시간과 교묘한 '밀당[밀땅](밀고 당기기)'을 한다. 남아 있는 방송 시간이 여유 있다면 애드리브를 넣어가며 여유 있게 진행을 하고, 촉박하다면 준비된 분량에서 꼭 필요한 말 만을 전달하기도 한다.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고 정확한 시간에 방송을 마쳤을 때는 쾌감을 얻는다.
특히 라디오 뉴스는 그 묘미가 더하다. 보통 매시 정각에 진행되는 라디오 뉴스는 시보 알림과 동시에 뉴스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 오후 3시 뉴스의 경우 3시부터 3시 4분 15초까지 진행되는데, 3시 시보 알림 이후 6-7개의 단신 뉴스를 전달한 뒤, 4분 14초에는 뉴스를 종료해야 여유 있게 다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늦어도 4분 5초가량에는 뉴스 리딩을 마치고, 날씨 정보(춘천 지역 현재 기온 O도, 습도는 O%입니다), 네임 사인(아나운서 OOO입니다), 콜사인(MBC 3시 뉴스를 마칩니다) 등을 해야지만 딱 4분 14초에 뉴스를 마칠 수 있다. 그래서 뉴스 리딩을 하면서도 두 눈은 시계와 원고를 왔다 갔다 하느라 바쁘다.
처음에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는 게 쉽지 않아서 날씨 정보나 네임 사인을 빼먹기도 했는데, 시행착오를 겪고 난 지금은 거의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됐다. 'MBC 3시 뉴스를 마칩니다'의 '다'라는 음이 4분 14초 정각에 나올 때의 그 쾌감이란, 느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굉장히 미묘해서, 긴장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날에는 진행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거나 너무 느려지기도 한다. 심할 때는 방송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사고를 낼 때도 있다. 이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시간을 섬세하게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 시간은 시청취들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나운서의 숙명일 테니, 나는 시간과의 밀당에서 고수가 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