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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play Jan 11. 2019

책이 읽히는 심야식당

춘천 육림고개 '아워테이스트(Our Taste)'


 그곳에 처음 간 것은 보름달이 떴던 세밑 겨울밤이었다. 그 날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늦은 시간까지 춘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춘천에 살고 있었고, 각자의 방식대로 춘천을 기억하고자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만큼이나 신선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날 먹었던 싱싱한 석화와 고소한 감자 와인은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을 들게 했다.


 그곳에 다시 간 것은 손톱달이 낮게 걸린 세초(歲初)였다. 육림고개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 직전의 작은 가게. 그래서 유독 달이 잘 보이는 곳. 이곳은 정식 매장이 아닌, 숍 인 숍(shop in shop) 가게다. '어쩌다 농부'라는 식당을 빌려 밤에만 반짝 운영하는 스페인 펍 '아워테이스트(Our Taste, 우리의 취향)'다.


'어쩌다 농부'는 저녁 6시부터 '아워테이스트'로 변신한다. 


 밤에만 열리는 '아워테이스트'는 스페인 타파스(Tapas) 요리와 술, 책, 그리고 음악이 있는 공간이다.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불현듯 스페인으로 떠난 사장님은, 산티아고 순례길 900km를 걷고 귀국해 어쩌다 보니 춘천 육림고개에서 작은 스페인 펍을 운영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여행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맴돈다. 낯선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 같달까.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누구든 거리낌 없이 들어와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곳. 이 곳에서 만나는 누구든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메뉴는 단순하지만 알차다.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자들의 소울푸드를 아워테이스트 스타일로 풀어낸 '햇감자 또르띠야'와 새우와 마늘을 올리브유에 튀기듯 구워낸 '감바스 알 아히요', 엄마가 해준 듯 풍성한 '스페인식 자두 닭조림' 3가지다.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다 보니 핵심 메뉴 3가지에 집중한 모양새다. 음료는 메인 메뉴와 잘 어울리는 스페인식 맥주와 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제철 재료를 이용해 석화 같은 시즌 메뉴를 내놓기도 한다. 사장님이 직접 쓴 메뉴판을 정독하는 것이 꽤 즐겁다.


아워테이스트의 감바스 알 아히요


 바삭한 새우를 매콤한 올리브유 소스에 찍어먹으면 절로 맥주가 당긴다. 사장님의 추천으로 스페인 대표 맥주 '에스트레야 담'과 함께 즐긴다. 새우를 다 먹은 뒤에는 남은 기름에 파스타를 볶아 준다. 닭갈비에 밥을 볶아 먹듯, 남은 감바스 소스에 파스타를 볶으면 두 배로 맛있다.


남은 감바스 기름에 볶은 파스타


 테이블에는 저마다의 책이 놓여있다. 가게에 들어섰을 때 어디 앉을까 고민했던 나에게 사장님은 '읽고 싶은 책이 있는 자리에 앉으세요'라고 응대했다. 그만큼 아워테이스트는 책을 읽기 좋다. 고전부터 최신작까지 곳곳에 놓인 책들을 돌려 읽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책이 절로 읽히는 심야식당 <아워테이스트>


 하지만 2019년 1월 11일, 육림고개의 아워테이스트는 문을 닫는다. 사장님은 육림고개에서 장사를 접고 (춘천의) 다른 곳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육림고개의 아워테이스트는 시즌 1에 불과했다"며 위로했다. 새로운 계절에 새로운 장소에서 꾸며질 '아워테이스트' 시즌 2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육림고개에 비밀처럼 숨어 있는 심야식당.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그리고 이곳에서 읽은 책과, 이곳에 오면서 봤던 달까지. 언젠가 춘천을 떠나게 된다면, 이곳에서의 순간들이 너무도 그리울 것 같다.






육림고개의 밤 (2019.1.10.)


[TRAVEL TIP] 육림고개
 작년(2018년) 말, KBS <다큐멘터리 3일>에 춘천 육림고개가 소개되면서 지인들로부터 육림고개에 대한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춘천'하면 소양강이나 남이섬, 의암댐 정도만 생각했는데, "춘천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육림고개는 1980~1990년대 춘천지역 최대 상권이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등장, 신도심 개발 등으로 침체기를 맞았지만, 2016년 춘천시의 청년상인 육성 사업을 계기로 청년 창업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지금은 춘천에서 가장 힙한 곳이 되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울의 연남동이나 망원동 같은 분위기다. 각자의 개성을 살린 작은 가게나 카페, 공방 등이 모인 골목길 상권이다. 아날로그 향기와 트렌디한 감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육림고개에는 아워테이스트 이외에도 다양한 매력의 가게들이 몰려있다. 힙한 곳을 가고 싶다, 혹은 아름다운 자연 말고도 트렌디한 춘천을 즐기고 싶다!라는 여행자라면 육림고개를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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