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笑笑)한 책읽기의 역사
어렴풋한 잠재기억 속에, 그러니까 내가 아마 네 살이나 다섯 살쯤이었나. <빨간 사과>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혹시 지금도 발행되고 있나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아닌 것 같다. 겉표지부터 초록 풀밭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랗고 새빨간 사과가 강렬했던 기억이 난다. 숲 속에는 빨간 사과가 있다. 숲 속 동물들은 지나가면서 한 번씩 호기심을 가지고 사과를 건드려 보지만, 사과는 꿈쩍도 않는다. 모두가 떠난 밤, 조용하던 사과 안쪽에서 조그만 애벌레가 쏘옥 얼굴을 내민다. 유아용 그림책이라 그림이 대부분이지만, 하루 종일 나는 엄마에게 그 단순한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어달라고 졸라댔다. 빨간 사과는 그렇게 나의 첫번째 책이 되었다.
어릴 적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는 수억 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우가 높은 나무에 달린 신 포도를 따 먹으려고 애쓰는 이야기가 있다고 치자. 그 동물을 여우가 아니라 하마, 사슴, 곰, 호랑이로 바뀌어도,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도토리, 사과, 심지어 매실이었다면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기는 게 아닌가.
조금 커서는 나니아 나라로 통하는 신비한 옷장이 날 끌어당겼다. 옷장 문을 열면 겨울 마녀가 에드먼드를, 나를 함께 유혹했다. 옷장 속에는 영상으로는 다 담을 수도 없는 세계가 텍스트로 발현돼 내 앞에 펼쳐졌을 때, 옷장만 열면 들어갈 수 있는 나니아 나라는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맨날 숨바꼭질 때마가 안 들키려고 그렇게 옷장을 들어갔었는데도, 거기서 이야기를 찾아낸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각자의 옷장 안엔 분명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사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내게 책을 읽거나 공부하라고 한 적이 없다. 방목인지 나를 믿었는지 알 순 없지만(사실 방목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먼저 책을 사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책을 골라서 사준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없이, 스스로 책을 좋아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 자녀들의 독서습관을 어떻게 키워 줄지 고민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아래 방법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내가 직접 시도해보고 성공한 방법이라, 어린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른이들에게도 해당된다.
1. 도서관에 자주 놀러가기
이 책 저책 고르다 보면 사기도 부담되는 대형 서점보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공짜로 맘껏 고를 수 있는 도서관이 좋았다. 어릴 때 책을 사 봤자 한 번 읽고 잘 안 읽는다. 도서관을 어릴 때 습관처럼 가야 한다. 나는 도서관에 공부하려고 다닌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책을 빌리러 다녔다. 책이랑 연애를 길게 하려면, 어렸을 때부터 책이 있는 공간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른이들에게는 다양한 큐레이션을 보고 나만의 책을 직접 고를 수 있는 동네책방을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쉽게 ‘까먹는’ 불치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책도 나중에는 절대 기억이 안 난다. 본격적인 독후감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읽은 책의 리스트만 적어 보는 것도 좋다. 책 제목, 저자, 출판사, 한 줄 느낌만 적어도 엄청나게 뿌듯하다. 더 많이 리스트를 쓰려고 더 많은 책을 읽게 된다.
2. 보상은 만화로 주세요
우리 초등학교는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기 검사를 하는 학교였다. 담임 선생님이 매일 일기를 걷기 때문에 몰아 쓸 수도 없다. 일기 쓰기 싫을 땐 말도 안 되는 동시라도 써 넣으면서 꾸역꾸역 빈 칸을 채웠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글쓰기의 습관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때는 너무 싫었다.
어린이의 그 힘겨운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건 집 앞에 있는 도서 대여점이었다. 소설책은 500원, 만화책은 300원. 엄마가 일기 다 쓰고 책 빌려준다고 하면, 그거 볼려고 평소에는 1시간이 다 되도록 뭉그적대던 일기를 10분만에 쓰고 책 빌리러 나갔다. 학습만화 적극 활용 권장. 동서양의 고전 팔 할은 그 도서대여점에서 빌린 만화책으로 배웠다. 능인출판사에서 나오는 만화로 보는 고전 이야기, 맹꽁이 서당, 심술통의 그림일기까지. 동서양의 각종 고전과 조선시대 역사는 다 만화책으로 배웠다.
3. 읽고 싶은 책만 골라읽기
고3때 밤새 로맨스 소설 보면서 눈물 좀 흘려 보면, 수능날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도 누구보다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용 전집을 사서 집에 들여놓는 게 가장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아이가 정말 재미있어할 만한 책은 고작 한두 권이다. 똑같은 디자인에 제목만 다른 책이 주루룩 꽂혀 있으면, 읽기도 전에 재미가 없어진다. 내가 고른 책은 아주 독특하고 개성이 넘쳐야 하는데, 갑자기 숙제가 되어버리는 느낌이랄까? 책읽기는 숙제가 되어선 안 된다. 책읽기는 보상, 휴식, 유희가 되어야 한다. "책 읽고 나가서 놀아." 가 아니라 "이 숙제 다 해야 책 읽을 수 있어." 가 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많이 읽게 되고, 빨리 읽게 되고, 읽지 않았던 분야에도 관심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인생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그 누구보다 많이 "읽고" 있다. 늘 핸드폰으로, 모니터로 보고 있다. 모두가 작가라고 하는 시대에, 지금처럼 SNS로, 웹소설로, 포털 기사로 읽을 거리가 넘쳐난 적은 없었다. 글 잘 써서 밥벌이 할 수 있냐고? 나에겐 평생을 고민해 온 문제였는데, 요즘 세상엔 당연히 가능한 것 같다. 그만큼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지만, 반대로 무슨 글을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읽다 만 책,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책, 언제든 다시 꺼내들 수 있는 책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습관처럼 운전을 하듯, 아침에 일어나서 무의식적으로 화장실부터 가듯(!) 책 읽기도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유튜브도 좀 봐야 되고, 인스타 업데이트도 해야 하고, 드라마도 밤새 몰아봐야 되고, 독서에 집중하기 힘들 만큼 오만 가지 재미있는 게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두 장씩만이라도 읽는 책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는 말도 안 되게 무궁무진하다. 책은 가장 쉽고 가장 다양한 가능성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이다. 나는 감히 창조주가 된다. 텍스트의 사이를 미끄러지고 구르고 달리다 보면, 하얀 바탕의 종이와 글자가 전혀 본 적 없던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이끈다. 지금 읽고 있는 것,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옷장 속이든 서랍 속이든 나만 알고 있던 놀이터 모래판 속이든, 이야기는 언제나 곧 발아할 씨앗처럼 숨쉬고 있다. 어떻게 뿌리를 내려서 우리 마음 속에서 꽃 피웠는지는 각자의 역사다. 싱싱한 가지에 듬뿍듬뿍 물을 주자.
지금,
읽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