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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Nov 01. 2023

홍원숙 할머니

 내가 열 살 때 부모님은 식당과 슈퍼를 시작하셨다. 워낙 음식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식당을 하기 전부터 공장에서 인부들 밥을 해주며 돈을 벌었었다. 그러다 기회가 생겨 작은 가게를 얻었고 식당 주인이 되었다. 특별한 돈벌이가 없었던 아버지를 위해 식당과 연결된 작은 공간에 슈퍼도 함께 열었다. 엄마는 식당 사장, 아버지는 슈퍼 사장이 되었다. 부모님은 아직도 그곳에서 돈벌이를 하신다. 식당은 일찌감치 접으셨지만, 슈퍼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33년 동안 부모님께 세를 놓은 건물의 주인은 여든둘의 홍원숙 할머니. 할머니는 가게 바로 위층에 사셨다.  

홍원숙 할머니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매를 키우셨다. 모진 시간을 혼자 버티며 살아온 인생은 할머니의 얼굴과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목소리도 크고 웃음소리도 호탕하셨으며 걸음걸이 또한 대장부 같았다. 어지간한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세상에 못 할 일이 어디 있냐고, 마음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가 조금 무섭고 어려웠었다.      


 여러 해 겪으며 할머니가 좋은 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나와 동생들이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용돈을 주시며 잘 컸다고, 기특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수능시험을 볼 때는 할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은 찹쌀 한 포대를 엄마에게 건네셨다. 큰 딸 시험 잘 보게 찹쌀밥을 지어주라고 하신 할머니.

 임용고시를 치를 때는 매번 떡을 사 주시곤 했는데, 시험에서 계속 낙방하자 어느 해는 손수 떡을 만들어 주셨다. 꼭 합격하라고. 는 그 해,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떡을 먹고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둘째 동생이 곧 임용고시를 본다. 할머니께서 이번에도 직접 떡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단다. 하지만 동생은 할머니의 떡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2023년 10월 29일, 홍원숙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성당에서 새벽미사를 드리던 중 쓰러지셨다는 할머니의 부고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나는 하고 있던 모든 걸 멈추었다. 냄비에서 끓던 국수물은 모두 졸아붙어 버렸고 눈에서는 눈물만 줄줄 흘렀다.     


 여든둘의 홍원숙 할머니는 내게 특별한 분이었다. 친할머니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사랑을 주신 분이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어르신 홍원숙 할머니.     

 시월의 마지막 날, 홍원숙 할머니를 뵙고 왔다. 얼마 만에 뵙는 건지, 이렇게 뵙게 되다니, 죄송한 마음에 선뜻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검은 띠를 두른 채 활짝 웃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마주할 수 없어서 등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아, 하시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셨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마음 여린 우리 수경이 울지 말거라. 착한 신랑도 데리고 왔구나. 고맙다. 고마워. 잘 살거라.”     


 조문을 마치고 자리를 옮겨 밥을 먹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울면서도 밥을 먹었다. 이건 할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식사야. 맛있게 먹어야지. 밥을 입에 넣고 꼭꼭 씹으며 통유리 밖을 바라보았다.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가벼이 흔들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달큰한 향기가 입 안에 돌더니 예전에 먹었던 할머니의 음식들이 느껴졌다. 뽀얗고 달달했던 식혜, 직접 불린 콩을 갈아서 만들어 주신 콩국수, 모양도 맛도 좋았던 할머니 손맛이 느껴지는 만두. 옥수수, 감자, 고구마 한가득 쪄 놓고 엄마와 나를 부르시던 할머니. 2층에 올라가 할머니와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면서 눈앞의 마지막 식사가 더 저릿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할머니의 가족 못지않게 엄마 마음에도 슬픔이 가득 차 있을 걸 알았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가게에 내려오셔서 커피도 마시고, 자식들에게 하지 못하는 마음의 넋두리를 엄마에게 털어놓으시곤 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엄마 또한 할머니에게 의지하며 그 자리에서 33년을 일하셨다. 매일 마주하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할머니의 죽음은 엄마에게 큰 상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엄마는 할머니의 부고를 들은 다음 날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가게로 출근하여 문을 들어서는데,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룽거려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도저히 장사 할 수 없어서 오전 동안은 셔터를 내린 채 동네를 배회하셨다는 엄마.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했던 두 여성의 삶은 많이 닮아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세놓은 가게에서 엄마 명의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네 딸을 대학에 보냈다. 오래전 홍원숙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억척스럽게 사셨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 테고, 엄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 사이를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 사이에는 긴 시간의 강을 함께 건너온 애틋한 우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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