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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여전사 Sep 07. 2021

엄마의 보호자가 됐다2

이불을 입에 물고 울던 밤

무엇이든 반전이 있으면 그 효과는 극대화되는 법이다. 반대되는 두 색상의 대비가 명확한 것처럼.


그날이 그랬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이전 나는 그 어떤 걱정도 없었다. 살면서 가장 걱정이 없던 시기.


회사에서는 3년차가 된 우리를 모아 1박 2일 교육을 진행했다. 신입 사원 연수 때와는 달리 군기 빠진 우리에겐 그저 쉬는 날이었다.


쉬는 시간, 우리는 난데없이 셔플댄스를 배워야겠다며 다 같이 춤을 췄다. 술도 안 마시고 맨 정신에 그렇게 갑자기 춤을 추는 날들이 있었나? 봄꽃들이 막 피고 있었다. 우리 같았다. 나뿐 아니라 동기들 중 누구도 걱정이랄 게 없었다. 가끔가다 회사 욕을 하긴 해도 아주 잠깐이었다. 돈도, 집도, 연애도, 결혼도, 회사 일도, 커리어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겨울을 끝내고 밀려오는 봄처럼 평화로웠고 막 피어나는 봄 꽃처럼 예쁜 날이었다.


후에 내가 좋아하게 될 남자애로부터 처음 연락이 온 날이기도 했다. 너무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그날은 그렇게 모든 걸 기억하게 했다. 그냥 날씨 좋은, 예쁜 날 중 하나였을 뿐인데. 오래도록 기억하는 그날.


“우리 집 가는 길에 내려줄게”

교육이 끝난 후, 본가에 가는 동기의 차에 타서 나도 부모님 댁으로 갔다. 금요일 오후였고, 교육은 빨리 끝났고 우리는 신났다. 엄마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응 엄마 왜?

나 지금 동기 차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우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그때로부터 일 년 전쯤, 작은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날, 엄마가 전화 너머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작은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한 그때부터, 엄마의 침묵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엄마 나 무서운데, 대답 좀 해줘. 왜 그래?”

“엄마 암 이래”


솔직히 말하면 그 후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전, 이전 병원의 기록을 다 들고 엄마가 친구와 함께 서울에 더 큰 병원으로 갔고, 거기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왔다. 결과 들을 땐 같이 가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상황이 긴박하다 보니 병원에서 엄마에게 전화로 통보를 했던 것이다. 엄마는 임파선암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암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울지 말고 있어” 이 말을 한 건 기억이 난다. 엄마한테 울지 말고 있어라니. 진짜 보호자 같이도 말했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울래미 딸 울래미가.


어린 시절, 내가 울때마다 이모들은 “울래미 딸 아니랄까 봐 너도 잘 우는구나”했다. 그러면 난 더 울었다. “우리 엄마 울래미 아니야!!” 울래미가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도 모르지만 울보란 뜻이겠지) 엄마까지 놀리니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엄마는 드라마를 제외하고 슬픈 소식을 보면 뉴스든 다큐든 울었고, 나는 코믹 영화를 보다가도 울었다. 진짜 울래미 모녀였다.


엄마가 울고 있고, 엄마가 암이라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그냥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중간에 내려준다던 동기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안방에서 나오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 아직도 울고 있었어?”

“아니야”

“왜 울어??? 요즘 의학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왜 울어. 더 씩씩해야지”

“죽으면 어떡해! 5년밖에 못 살 수도 있대. 임파선은 온몸에 있어서 전이됐으면 얼마 못 산대”

“어디서 찾아봤어?”

“네이버”

“엄마 네이버 지식인 봤지? 그거 초등학생들이 댓글 다는 거야. 의사 선생님 말을 믿어야지. 엄마 이제 네이버 금지야. 보지 마.”

“그래?”

“그럼! 엄마 고칠 수 있어. 다 고칠 수 있어. 내가 고쳐줄 거야. 엄마, 그거 여기 병원에서 뭔지 모른다고 한 거 내가 큰 병원 가라 해서 찾은 거잖아. 못 고치면 내가 번 돈 다 써서라도 누굴 찾아가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고칠 거니까 엄마는 걱정도 마. 이제 폰 보지 마”

“응 그래. 밥 먹었어?”


엄마에게 말하면서도 나는 나에게 새삼 놀랐다. 울지 않는 내가 이상할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씩씩했나? 이렇게 냉철했나?


나의 단호함에 놀랐는지 엄마는 엄마대로 또 아무렇지 않아 졌다. 마음속에 서로 어떤 생각들이 피어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우 평소와 같이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웃기도 했다.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길, 엄마도 우리 딸이 저렇게 냉정하다고? 싶긴 했는데, 다 고쳐 준다는 내 말이, 돈 걱정도 하지 말라는 내 말이 그렇게 든든했다고 한다. 허세도 가끔은 써먹을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밤을 맞이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네이버에서 임파선암을 검색했다. 5년 내 생존율. 암환자, 보호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그 수치. 아 엄마가 이거 보고 5년밖에 사니 안 사니 했구나. 엄마에겐 인터넷 하지 말라 해놓고 나는 관련된 글들을 모두 읽었다. 암환자 카페에도 가입했다. 무서웠다. 엄마한텐 큰소리쳐두고 나는 너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붙잡고 나는 그 암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몇 번은 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임파선암 환자가 그린 웹툰을 보게 됐다. 아주 젊고, 아주 똑똑했던 그리고 아주 평범했던 그녀의 투병기가 너무 재밌었다. 나는 검색을 시작했던 이유도 잊고 그녀의 웹툰을 정독해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투병기가 아닌 일상 웹툰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다 이겨내면 되지. 할 즈음에 나는 그녀가 이미 하늘나라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려움이 물 밀듯이 밀려들었다면 그녀에게 실례일까. 나는 고장이 난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끅끅거리면서 울다가 나는 문득 엄마도 못 자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불을 물었다.

이불을 물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어린 나였으면 “엄마 나 무서워”하고 달려가서 엄마를 안고 잤을 텐데. 안방에는 더 무서워할 엄마가 있으니까.


서로 상반되는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고 한다. 그날을 기억하라 하면 검은색일 뿐이다. 무섭고 길었던, 검은색 밤. 나는 그 밤에 그렇게 소리 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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