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이 할머니가 된 그날

꿀꿀꿀 꿀

by 마도

유솔아!

네가 할머니를 "꿀꿀이 할머니!" 하고 부를 때마다 할머니는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면서 웃음이 난단다. 사실 그 이름은 할머니가 너에게 받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귀한 선물이지.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그 특별한 이름을 나누게 되었는지, 그날의 풍경을 하나씩 꺼내어 들려줄게.


네가 세 살 무렵이었어. 할머니는 자고 나면 쑥쑥 크는 네 모습이 눈에 밟혀 한달음에 너희 집으로 달려갔지. 하지만 할머니가 낯설었는지, 너는 현관문 앞에 선 할머니를 보자마자 엄마 치맛자락 뒤로 쏙 숨어버렸어. 통통하고 작은 두 손으로 엄마 치마를 꼭 쥐고, 빼꼼히 한쪽 눈만 내밀어 할머니를 살피던 네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할머니가 다가가려 하면 너는 부끄러워 더 깊숙이 엄마 뒤로 몸을 숨었어.

어떻게 하면 저 예쁜 얼굴을 마주 볼까 하는 궁리가 앞섰단다.

할머니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너와 눈높이를 맞췄어.

너의 관심을 끌 방법이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가 "꿀꿀꿀 꿀." 소리를 냈지.

입을 돼지 모양을 하고서. 너는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까르르 웃었어.

할머니는 또 "꿀꿀꿀꿀." 했지.

너는 그 소리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

할머니는 신이 나서 입모양을 꿀꿀 돼지 모양을 하면서 더 크게, "꿀꿀꿀꿀" 하고 노래하듯 소리를 냈어.

그랬더니 너도 엄마 치맛자락을 놓고 할머니에게 다가와 입을 오물거리며 "꿀꿀꿀꿀" 하고 화답해 주었지. 그 소리에 아빠, 엄마, 너, 할머니 모두 다 웃었단다.

그 짧은소리가 우리 사이의 어색한 벽을 허물고 마음을 이어주는 마법의 다리가 되어준 거야.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너만의 '꿀꿀이 할머니'가 되었고, 할머니는 너를 만날 때마다 "꿀꿀꿀꿀." 하게 됐어. 너는 이제 할머니를 보면 당연하다는 듯 "꿀꿀이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넨단다.


이제 여덟 살이 된 너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35년 전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곤 해.

지금의 너와 꼭 닮은 여덟 살의 네 아빠. 그 시절 아빠도 지금의 너처럼 해맑고 영특한 아이였단다. 네가 지금 수십 가지 포켓몬 이름을 줄줄 외우며 장난감을 종류별로 모으는 재미에 살 듯이, 네 아빠는 거실 바닥에 공룡 장난감을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줄 세워 놓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어. 티라노사우루스가 앞장서고 트리케라톱스가 그 뒤를 따르던 아빠의 공룡 행렬은 거실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곤 했지.

아빠는 밤마다 우주 이야기 책을 머리맡에 두고 할머니에게 읽어 달라 했지. 날마다 별과 행성 이야기를 자랑하곤 했단다.

눈을 반짝이던 어린 아빠의 모습이, 지금 포켓몬 카드를 설명하는 너의 눈망울 속에 그대로 들어있단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살짝 내미는 아랫입술이나, 약간 찡그리는 눈썹을 볼 때면 아빠의 어릴 때 모습과 어쩜 그리 똑같은지. 책장을 넘길 때의 그 가늘고 긴 손가락까지.

할머니는 가끔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해.

요즘 엄마 아빠는 할머니가 너에게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준다고 눈치를 주곤 하지. 하지만, 유솔이 네가 장난감 상자를 뜯으며 짓는 그 환한 미소를 할머니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니. 사실 백화점에서 네가 고른 장난감을 손에 쥐여줄 때, 할머니는 35년 전 가난했던 젊은 엄마 시절, 네 아빠에게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다 사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있단다. 그때 아빠에게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감을 많이 더 사주지 못해 마음 아팠거든.


장난감만큼이나 책을 좋아하는 유솔이가 할머니를 만나면 하는 말이 있지.

"꿀꿀이 할머니, 오늘은 어떤 책 사왔어?"

궁금해하며 커다랗게 뜬 눈으로 할머니를 보는 너를 보면 할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란다.

어느새 한글을 다 떼서 할머니가 사다 준 책을 앉은자리에서 조용히 다 읽어버리는 너. 할머니는 오늘도 이 행복을 기록한단다.

끝말잇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막히면 "할머니, 땡!" 하면서 즐거워하는 너.

일부러 어려운 끝말잇기를 내어 할머니를 곤경에 빠트리는 너에게 할머니는 질 수밖에 없지.

할머니가 지면 그렇게 좋아하며 큭큭큭 웃던 너의 모습이 떠올라 할머니도 즐겁다.


너의 오늘이라는 풍경 속에서 아빠의 어제를 읽어내는 이 시간들이 할머니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소중하단다. 이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예순 장의 편지가 되었을 때, 그리고 훗날 네가 커서 이 글을 읽을 때, 너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다정했는지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할머니는 오늘도 너와 나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오늘도 꿀꿀, 꿀꿀이 할머니가-


다음 연재 글은 "아빠도 너처럼 아기였을 때가 있었어."가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꿀꿀이 할머니의 시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