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고래 잡으러~~~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1970년대 젊은이들의 절박한 탈출구였다.
청년들은 기타 줄을 튕기며 저마다의 마음속에 푸른 파도를 열망했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 눈에 비친 그 시절은, 국가가 정해준 엄격한 규율과 통제의 박자와, 청춘이 갈망하던 자유의 박자가 끊임없이 충돌하던 기묘한 이중주 같았다.
거리엔 늘 단속이 있었다.
장발을 한 오빠들의 머리카락은 거리에서 경찰의 가위질에 잘려나갔다.
경찰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바리깡으로 흉하게 밀었다.
아가씨들의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 5센티미터가 넘는지 자로 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릎 위를 자로 재서 5센티미터가 넘으면 경찰에 잡혀갔다.
밤 10시가 되면 무미건조한 방송이 거리거리에 울려 퍼졌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속히 귀가하십시오."
거리는 12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집에 빨리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다급함으로 분주했다.
외출했던 오빠들도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오느라 애를 썼다. 그러다가 종종 통행금지에 걸려 아침에 쑥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오곤 했다.
한마디로 국가가 정한 시간에 맞춰 자고 일어나야 했던, 거대한 시계태엽 속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또 금지곡에 걸린 가요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금지곡에 걸린 대중가요들의 이유는 어이없고 허무맹랑했다.
대부분 가사나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중가요는 말 그대로 대중이 즐기는 노래이다. 대중가요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를 당하는 것은 대중들의 취향을 무시하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우리 큰오빠는 단속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기른 머리와 밑단이 너풀거리는 나팔바지를 고집했다. 그러다가 장발 단속에 걸려 결국엔 머리를 자르게 되었고, 급기야 빡빡 밀어버린 오빠. 청바지에 통기타를 둘러맨 큰오빠의 모습은 억압적인 세상에 던지는 반항이었다.
청년들은 어디에 해소할 길 없는 울분을 통기타로 날려 보내기 위해 거리엔 통기타를 멘 젊은이들이 많았다.
큰오빠 방은 늘 그 저항의 선율로 가득했다.
대학생인 큰오빠가 기타를 잡고 <고래사냥>의 첫마디를 강하게 내리칠 때면, 동해바다의 파도가 치는 것만 같았다. 그 옆에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해 밤톨처럼 머리를 빡빡 민 작은오빠가 있었다. 작은오빠는 큰오빠의 현란한 손놀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형, 나도 그 '자 떠나자' 하는 부분 좀 가르쳐줘."
간절한 부탁에 큰오빠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기타를 건네면, 굳은살도 박이지 않은 작은 오빠의 손가락이 기타 줄 위에서 뭉툭하게 겉돌았다. 그 서툰 음정 사이로 형제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학교에서도 귀밑 2센티미터라는 규정아래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 여중생이었던 나는 날마다 교문 앞에서 머리를 단속하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았고, 머리가 길다 싶으면 교무실로 끌려갔다.
그뿐인가. 학교에서는 육성회비를 기일 내에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교실 앞에 불러다 놓고 언제까지 낼 수 있느냐고 독촉을 했다. 심지어 집에까지 돌려보내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밤 10시 귀가 방송에 쫓겨 돌아와야 했던 청년들이었지만, 그들이 튕기던 기타 줄만큼은 통행금지 사이렌보다 멀리 울려 퍼졌다. 비록 머리카락은 잘리고 발걸음은 묶였을지언정, 그 시절 청춘들은 노래를 통해 스스로 바다가 되었고 고래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자와 가위는 사라졌지만, 가끔 라디오에서 송창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여전히 큰오빠의 방이 떠오른다.
지금은 고인이 된 빡빡머리 고등학생과 나팔바지 대학생이 함께 잡으려던 그 푸른 고래.
지금 어디쯤을 헤엄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