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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위해 시작한 일

by 정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채택된 글입니다.)


지하철에서


출근길 지하철. 한 남자가 큰소리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야, 그거 말이야! 내가 몇 번을 얘기했냐고!"

목소리가 지하철 안에 크게 울렸다. 사람들이 슬쩍슬쩍 눈치를 줬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렇게 큰소리로 전화를 하면 어떡해. 지하철에서는 통화를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괜히 아침부터 감정적인 싸움이 될 것 같아 꾹 참았다.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다.

어느 날은 한 아주머니가 오랫동안 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호호호."

자그마치 40분 동안 통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언쟁하기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었다.


어느 날은 멀쩡해 보이는 아저씨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아저씨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었다.

임산부 자리는 비워두어야 한다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언쟁이 날까봐 말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않을 수 없어서 최대한 짧게 통화하려고 애썼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그때 저쪽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그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매너 좀 지킵시다!"

목소리는 컸고, 표정은 매서웠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황당하고 창피해 얼굴이 붉어졌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내가 전화를 오래 한 것도 아니고, 큰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굳이 찾아와서 저렇게까지 면박을 줘야 하나?


그해, 우리 며느리가 임신을 했다. 며느리는 회사를 다니며 매일 지하철을 탔다. 당연히 임산부 배지를 핸드백에 달고서 출퇴근을 했다.

"요즘 지하철 어때? 자리 양보 잘해주니?"

"아니요. 항상 서서 가요."

"왜 그래? 임산부석에 앉으면 되잖아."

"거기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어요. 임산부 배지 보고도 그냥 앉아 있던데요."

"그럼 말을 하지. 임산부라고."


며느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말을 해요. 임산부 배지 보고도 앉아 있는데요. 그냥 서서 가는 게 편해요."

그동안 나는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며 말은 못하고 속으로 불평만 했다. 감정적인 싸움이 될까 봐.

그런데 정작 임산부인 며느리는 배지를 달고도 말을 못 하고 서서 간다는 거였다.


며느리가 서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임산부 배지를 보고도 어떻게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있지?'

며느리 이야기를 듣고나서 앞으로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며느리는 '보이는 약자'니까. 임산부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아니까.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는 임산부 자리입니다.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워주셔야 임산부들이 앉습니다."

처음엔 떨렸다. 하지만 며느리 생각을 하면 용기가 났다.

어떤 사람은 미안하다며 바로 일어나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슨 참견이냐는 듯이 나를 쏘아보며 일어났다.


어느 날은 여자 스님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스님에게도 말했다.

"스님, 죄송하지만 여기는 임산부 자리입니다. 비어있는 다른 자리로 가주시겠어요?"

스님은 창피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아무 말 없이 다른 자리로 갔다.


며느리가 만삭이 되고 나서는 더 안타까웠다. 비록 며느리를 지하철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임산부 자리에 멀쩡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심사가 뒤틀리곤 했다. 10개월이 흘렀고, 며느리는 무사히 순산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지하철을 타보면 예전보다 임산부 자리가 비어 있을 때가 많다. 그동안 의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그래도 아직까지 임산부 자리에 턱 앉아서 가는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이 있다.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말을 한다.

"죄송하지만 여기는 임산부 자리입니다. 비워두셔야 임산부들이 앉습니다."

어찌보면 오지랖일 수도 있고, 남의 눈총을 받을 수 있지만 나는 이 말을 계속 할 것이다. 이상한 건, 임산부석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데, 전화하는 사람들이나 수다 떠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참아야 하는 건가?' '다들 참는데 나만 유난 떠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면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게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다. 나도 언젠가는 실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본의아니게 지하철안에서 급한 전화를 받았고, 아저씨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때는 황당했지만 내게는 사정이 있었다. 큰소리로 전화하던 저 남자에게도, 오래 수다 떨던 아주머니에게도, 임산부석에 앉은 아저씨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그마한 배려가 세상을 바꾼다

그래도 조금씩은 배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배려해야 한다.

나도 전화를 받을 때 최대한 조용히, 짧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큰소리로 전화를 하거나, 수다를 떠는 건 매너가 아니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탄다.

여전히 큰소리로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여전히 말은 못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임산부석에 누가 앉아 있으면, 나는 다가간다.

"죄송하지만 여기는 임산부 자리입니다.비워 놓아야 임산부들이 앉습니다."


5년 전 며느리를 위해 시작한 일. 이제는 누군가의 며느리를 위해, 누군가의 딸을 위해, 세상의 모든 임산부를 위해 계속하고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을 위한 자그마한 배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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