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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Jul 02. 2024

마지막 편지

                                                            

오늘은 당신과 자주 왔던 서해안의 바닷가에 왔어. 솔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당신의 숨결처럼 내 얼굴을 스치는군. 바다 저편의 풍경이 뿌옇게 보이네. 바닷가 옆 카페에 앉아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아무 말 없이 둘이서 바닷가를 거닐었던 곳. 기억나? 풍경은 그대로인데 나는 혼자네.

 며칠 전, 당신 유품들을 정리했어. 그동안은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 감히 손도 대지 못했던 건데. 당신이 깨알같이 적어 놓은 노트며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태우고 정리하다가, 당신의 업무일지 속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은 짧은 메모를 발견했어.   

   

 x월 x일

 야근이다. 좀 쉴 시간. 사슴 생각이 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린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사랑만 하기에도. 사슴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여자다. 반면 나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남자다. 못난 놈. 나만 믿고 온 사슴한테 무엇을 해줬나. 앞으로도 난 능력이 없다.

     

 그 일기를 본 순간 난 머리끝까지 질투심으로 불타올랐어. 도대체 이 사슴이 누구야? 그러나 다음 일기를 보고서야 그게 나라는 걸 알았지. 생전에 당신이 나에게 사슴이라고 단 한 번도 불러준 일이 없어서 사슴이 누구? 했던 거지.     


 x월 x일

 모두 잠든 상황. 집을 나선다. 딱 1년 남은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30년 동안 내 청춘을 바쳤고, 내 청춘이 스러져 간 곳. 참 못난 놈. 기지개 한 번 켜지 못하고 사는 동안, 착한 사슴은 점차 맹수가 되어갔다. 내 잘못이다. 자신도 없으면서 왜 기르려 했나. 어떤 의미도 없이 쳇바퀴 돌 듯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별다르랴. 다 거기서 거기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그렇게 가는 것일까. 뭉쳤다 흩어지는 구름처럼.  

    

 x월 x일

 사슴이 입원했다. 선한 눈을 한 사슴 얼굴이 핼쑥하다. 회사 직원들이 사슴이 누워있는 병실을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으로 나는 흐뭇했다.     


 x월 x일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어. 그날 너와 난 긴 얘기를 나누었지. 만난 지 3시간 40분 만에 오동도 대나무 숲에서 한 첫 키스. 넌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았지. 그날 여수 오동도, 바람 부는 언덕 기억나니?     


 당신이 아무도 몰래 적어 놓은 짧은 일기를 보고 난 너무 놀랐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왜 그리 표현을 못 했을까. 일기장엔 사슴이라고 적어 놓았으면서 정작 나에겐 한 번도 불러준 적 없는 사슴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었어.

 그런데 당신, 뭐가 급해서 그렇게 급작스럽게 간 거야? 마지막 가는 길, 뭐가 그리 급해서 나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그런 모습으로 간 거냐고.

 몇 년 전 어느 출근길 아침, 당신은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 쓰러져 있었어. 당신을 붙들고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의식이 없었지. 응급차를 타고 가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당신은 끝내 눈뜨지 못했어. 의사는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했어.

 영안실에서 당신의 영정사진을 보면서도 난 믿기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놀라게 해 주려고 어디론가 숨어 있다가 짠! 하고 나타날 것만 같았지.

 한참이 흐른 뒤, 당신이 정말 나를 떠났다는 걸 실감하면서부터 모든 게 허망해지기 시작했어. 마치 팽팽했던 고무줄이 툭! 끊어진 느낌이랄까. 당신을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어.      

 한 3년 전쯤인가. 혼자 이 바닷가에 왔었어. 물이 빠진 바닷가는 적막했어. 나는 갯벌이 드러난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지. 그러다 어느 순간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밀려오는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당신이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어. 바닷물은 강렬한 손짓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어.

 ‘어서 와! 어서 와! 이리, 들어와!’

 그 모습은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은근한 몸짓으로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어. 나도 모르는 사이 손짓하는 물길을 따라 점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어. 다리를 타고 올라온 냉기에 후드득 몸을 떨며 걸음을 옮겼지. 바닷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어. 나도 모르는 사이 바다 안쪽으로 상당히 들어와 있었어.

 “거기서 뭐 해요. 빨리 나와요!”

 바닷가 쪽에서 어떤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어. 그 남자는 나를 해변 쪽으로 끌어냈어. 나는 몰려오는 추위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지.

 모여든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 발인제를 마치던 날, 나를 붙들고 울던 아이들이 떠올랐어.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왔지.

 그러고 보니 스물한 살에 당신을 만나 30년을 넘게 살았네. 참으로 긴 세월이었는데, 어찌 보면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들어.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망으로 결혼했지만, 현실은 힘들 때도 많았지.

언젠가 귀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지.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당신을 봤어. 너무나 지치고 외로워 보였던 내 남자의 뒷모습, 왜 그리 안쓰러워 보이던지. 잘해줘야겠다 생각했지만 그건 마음뿐, 당신에게 살갑게 하지 못했어. 미안해.

당신 생각나? 결혼 전 우리 데이트할 때 자주 갔던 덕수궁 말이야. 돈이 없어 포장마차에서 우동 먹고 덕수궁 벤치에 앉아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던지, 당신이 하숙했던 신설동 하숙집, 자주 갔던 순두부집, 당신과 다투고 헤어지겠다고 소주 마시고 토하던 보문동 모퉁이길, 을지로, 무교동 낙지 골목, 플라자 호텔 뒤에 있던 가화 다방.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일까?

여보. 당신 떠나기 전날 밤 말이야. 친구와 함께 저녁 먹고 있는데 당신이 전화했잖아. 퇴근 후 집에 와보니 아무도 없다면서 한달음에 내게로 왔어. 그때 친구가 당신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던 거 기억나?

 “정윤이 사랑하세요?”

 “사랑하죠, 아주 많이.”

 “그럼 평소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시나요?”

 “아니요, 한 번도.”

 “그럼 지금이라도 해보세요. 사랑해,라고.”

 “아니요, 그런 말 잘 못 합니다.”

 “그럼 해주고 싶은 말은 없어요? 이 기회에 한 번 해보세요.”

 당신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했어.

 “할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놈 만나서 함께 해준 당신에게 고맙고,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깊은 감동이었어. 그런데 그게 당신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네. 마치 당신이 그렇게 갈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동안 나랑 살면서 왜 그리 그런 말들에 인색했던 거야? 바보같이. 난 정말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나는 당신 인생에 몇 번째일까, 하며 우울할 때가 많았단 말이야.

 당신이 떠나고 나자 너무 미안했어. 많이 외로웠을 당신을 품어주지 못한 점. 당신이 화낼 때 참지 못하고 같이 화냈던 점. 당신을 최고라 치켜세워주며 살지 못한 점. 당신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던 점. 후회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지.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에게 작별 인사하기 위해서야. 당신과 자주 왔던 이곳에서 이제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어.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

저 멀리 당신이 환하게 웃고 있네. 저건 환영이겠지. 당신이 이곳에 있을 리 없지.

여보, 당신과 함께한 세월 굴곡도 많았지만 고마웠어. 나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줬던 당신.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했던 것처럼, 나 역시 고맙다는 말을 왜 그리 못 했는지. 이제야 말하지만 고마웠어. 그리고 사랑했어. 이 세상 끝나는 날, 나를 다시 만나면 환하게 웃어줘. 그동안 잘 살고 왔다고 말할 수 있게. 잘 지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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