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가볍게 아침 산책을 하고 현관 앞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오전 내 그늘진 자리라 책 읽기에 좋다. 집 앞 길이 훤히 보여 지나는 사람이나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기도 좋다.
여기 앉아서 책만 보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나뭇잎의 흔들리는 리듬에 생각을 실어 보내기도 하고 이따금 한 쌍의 다람쥐가 술래잡기를 하듯 가지 사이를 재빠르게 달리는 걸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관찰하다 보니 다람쥐 울음소리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내 딴에는 비슷한 것 같은데 다람쥐는 도통 반응하지 않는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펼쳤다. 꽤나 오래전에 사 두고도 제목만 바라보던 책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깊은 곳까지 내려가기에는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책을 펼치고 한참을 읽다 다시 집 앞 나무를 바라본다. 푸르고 넓은 잎을 가진 아몬드 나무(Talisay)가 며칠 사이 단풍이 지듯 붉은색을 띠기 시작하고 제법 많은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온도가 올라가면서 나무는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잎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단풍이라기보다 낙엽인 셈이다.
2월이 지나면 햇살은 따갑고 온도는 높아진다. 비는 오지 않는다. 곧 땅이 마르고 뜨거운 태양을 받아 잎이 마르고 붉은 낙엽이 지기 시작한다. 3월부터 5월까지 한여름 더위가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6월부터 장마가 시작된다. 마닐라의 계절은 건기와 우기만 있는 여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미세하게 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그는 죽음을 비극으로 세우지 않았다. 붉게 다 채워진 잎이 조용히 나무를 떠나듯, 평생을 지성의 언어로 채우신 그분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분의 글은 붉게 변해가는 나무를 다시 보게 하고 그리고 내 내면을 향해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사이 잎들이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진다.
나는 아직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여행인_듯_일상인_듯
#다섯_시의_남자
#마닐라_일상
#낯선_거리_내게_말을_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