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일기
어렸을 때부터 편지 쓰는 걸 좋아했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엔 핸드폰이 없었으니 카톡도, SNS도 없었다.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전화와 삐삐밖에 없었는데 그것보다는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게 더 좋았다. 친구들과 하루에 두세 통씩 편지를 주고받았고,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던 친구들의 속마음을 편지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교환일기를 썼다. 짝반 친구랑도 쓰고, 자매반 언니랑도 쓰고, 남매반 동생이랑도 썼다. (그러다 남사친과 눈이 맞아 남친이 되기도 했다.) 혼자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친한 친구에게 종종 내 일기장을 보여주며 친근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지간히도 주변 사람과 소통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던 때에 동아리에 들어가 처음으로 이메일이라는 걸 만들었다. 온라인으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꽤 신기했다.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싸이월드가 생겼다. 미니홈피에 사진을 올리고, 내 일상을 공유하고, 파도를 타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일상도 들여다볼 수 있는 파격적인 서비스. (없어져서 서운했는데 올해 다시 복구된다니 다행이다!) 온라인으로 소통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글을 길게 쓰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컴퓨터 메신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간단히 전하는 게 너무 쉬워졌으므로. 미니홈피에 내 마음을 표현할 때도 긴 글보다는 이모티콘 하나를 적는 게 더 세련돼 보이던 시절이었으므로.
정신없이 사느라 편지 쓰는 즐거움을 잊고 살지 않았나 싶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에는 내 생각을 담은 글보다는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푸는 게 중요했고, 첫 발령을 받은 후엔 공문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기 바빴다. 소설보다는 자기 계발서를 주로 읽었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보다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된 후, 뱃속의 아이와 함께 변해가는 일상들을 '육아일기'에 적기 시작했다. 적어둔 일기는 1년에 한 권씩 책으로 만들었다.
다섯 권의 책을 만들고 나서 옮기게 된 학교는 지금까지의 교사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겪게 해 주었다. 일상에 지쳐있었고, 그 일상의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가정에서의 여러 요인들로 인해 심신의 부담을 갖게 되면서 2019년 담석증 수술과 2020년 허리디스크 시술로 삶의 질이 바닥을 쳤다. 시술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출근을 해야 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약기운에 누워있느라 집은 엉망이 되고 아이들은 방치됐다. 에너지가 넘치던 내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점점 우울해지기만 했다. 그렇게 마음이 다치고 몸이 망가져있던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가 바로 덕질이었다.
기운 없이 누워있던 상태로 할 수 있던 건 음악을 듣는 일뿐이었는데 그때 도망가자라는 커버곡을 부르던 정승환의 목소리에 위로를 받고 예전에 진행했던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가득하던 나에게 아직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게 다가왔던 말이 바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기독교에서 쓰는 말인데, 간단히 말해 '불쌍히 여긴다'는 말. 남을 괴롭히느라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 사람을 보며 '남을 미워하며 사는 인생 참 불쌍하다'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편해졌고, 미워하는 마음들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지금은 팬카페 매니저를 3년째 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글로 남겨두고자 '덕질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파도치던 감정들을 글로 적으며 내 마음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말과 글을 필사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필사라는 게 뭔지 몰랐던 시절, 글을 옮겨 적는 것 또한 마음의 위안이 되고 생각을 정리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필사를 하고, 그에 대한 생각도 덧붙였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잔잔해졌다.
덕질을 하며 얻게 된 것 중 가장 특별한 점이 바로 둘째와 덕친이 된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딸들을 콘서트에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둘째가 정승환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 몸과 마음이 아파서 혼자 부엌에서 울고 있을 때 조용히 휴지를 갖다 주던, 공감 능력이 놀랍도록 뛰어난 아이. 왜 정승환의 노래가 좋냐고 물어봤더니 그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로가 되는 노래야"라고 대답했다. 그 후 아이와 페스티벌에도 같이 가고, 부산에 있는 덕친들을 만나러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소통과 공감을 더 깊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과 마음들도 덕질일기에 열심히 적어두었다.
둘째는 내가 쓴 자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북토크를 다니며 친분이 생겼던 오은 시인님을 학교 연수에 초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과 함께 덕질하며 위로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해 조언을 듣게 되면서 나의 첫 책인 덕질에세이 '같이 걷자, 우리'를 출간하게 되었다. 나의 마음이 성장하게 되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과정들을 글로 적고 수십 번 퇴고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에세이를 많이 읽게 되었는데, 김신지 작가님의 에세이들이 내 마음의 결과 참 잘 맞는다고 느껴졌다. 작가님의 인스타를 팔로우해서 지켜보다가 '행복의 ㅎ'을 기록하는 리추얼 모임에 가입하여 행복을 줍는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행복의 ㅎ은 퇴근길에 우연히 보게 된 노을이 예뻤다든지, 길에서 먹었던 붕어빵이 맛있었다든지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서 간단히 매일 적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작은 행복들을 매일 하나라도 찾아서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다 보니 딸들이 해주었던 한마디 말이나 작은 행동들까지 상세히 적으며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더 많이 감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일기'를 블로그에 남기고 meet me 리추얼에 인증하기 시작했다.
행복의 ㅎ을 쓰다 보니 학교에서도 작은 행복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힘들었던 일들을 극복해 나간 과정, 금쪽이들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대화 내용, 동료 교사들과 함께 지내며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기록하는 '교사일기'도 꾸준히 적었다. 그러다 작년 8월, 이런 기록들을 전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겨서 백여 명의 기록자분들과 함께 기록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행복의 ㅎ 기록서랍방에서 만난 분들 중 브런치 작가 활동을 하시는 분과 친분이 생겨 '작가의 여정'이라는 전시회를 함께 보러 가게 되었다. 워크북을 작성하는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 임시 브런치 작가 명함을 받았고, 그 후 몇 개의 글을 발행하여 정식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정말 럭키비키쟈나~!!!)
현재 브런치 스토리에는 13개의 글밖에 없는데 신기하게도 블로그에 글을 쓸 때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라이킷(좋아요)을 눌러주셨다. 제일 최근 작성했던 글'우리가 맞벌이하는 동안 내 아이에게 벌어지는 일'은 처음으로 라이킷 30을 넘겼고, 조회 수가 7천을 돌파했다는 알림을 받았는데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이 보시기에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참 신기하고 생소한 경험이었다.
글쓰기는 내 삶의 절반을 지나가는 시기에 만나게 된 구세주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었고, 나를 좀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내 주변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소소한 글쓰기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교사성장학교의 1일 1포 미션이 글쓰기를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나에게는 무궁무진한 글쓰기 소재들이 주변에 펼쳐져 있으니! (사실 교사의 전문적 지식 향상에 도움이 될만한 포스팅을 쓰는 게 제일 어렵다... ㅠㅠ) 계속 성장해 나갈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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