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실패한 인연들에 대해, 이렇게 희미할지 모르고, 그 시절 우리는 얼마나 아팠나.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심장의 휑함도 결국은 우리를 망치지 못하고 성장시켰다.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내가 얼마나 기억력이 좋지 못한 지 이번에 깨달았다.
어떤 추억은 힘이 세고, 어떤 추억은 희미하다.
지금 너의 시리게 아픈 기억이
희미하게 아스러지길.
<나의 이야기>
나는 1년 전부터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항상 있었지만, 항상 메모앱에 찌끄리는 수준이었지, 정식으로 글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원서 읽기 독서모임에서 현직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고, 다양한 글쓰기에 도전했다.
우리의 올해 10월 주제는 '나의 남자들(사랑과 성장)'이었다. 제목부터 멍해졌달까. 세상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기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주제같이 느껴졌다. 이어지지 못했던 남자들의 얼굴도 떠올랐고, 연애라고 해도 될지 모를 구남친들의 얼굴도 스쳤다. 그러다 결국, 구남친 모두를 글에 등장시켰다. 아 이 의미 없는 남자들의 조합이, 무슨 울림이 있으리라 시작했던 나의 글쓰기가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음, 이 글에서는 세 번째 남자친구에 대해 자세히 써보려고 한다. 내 자존감이 얼마나 바닥인지 깨달을 수 있는 처절한 연애였고, 그로 인해 남자 보는 눈이 생겼으니 내 인생의 은인이라 하겠다. 불안정한 10대를 지나온 나에게 연애는 어려운 일이었다. 스무 살 나에게 대시했던 남자 둘과 짧은 연애 이후 몇 번의 썸만 있었을 뿐 1년 이상 연애를 쉬는 중이었다. 당시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다 남자친구가 생겼고, '솔로'라는 이유만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중 엄청 얄밉던 동기가 모든 말 끝마다 '남친이나 사귀어'를 달고 살았으니, 승부욕? 강한 나의 남자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친구가 해주는 소개팅을 열심히 나가다 그를 만났다. 같은 학교 다른 과였던 그는 키가 크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여기서 인생 일대의 실수는 그저 'Not Bad'로 나의 남친감임을 확정했던 나의 어리석음이었으리라.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귀한 막내아들이었다. 다소 결벽증이 있었으며, 이기적인 성향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당시 투철한 목표의식으로 남자 친구 만들기에 적합한 사람이다라는 맹목적인 결심으로 전후사정 안 보고 그에게 빠져들었다. 사귀기 직전 순간에 나에게 전화를 준 친구의 고마운 조언조차 날려버렸다. 그 전화 내용은 그가 나와 데이트를 하던 중에 다른 소개팅을 찾고 있었다는 제보였다. 왜 사람은 무덤을 파고 관짝에 들어가 봐야 정신을 차린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이 지론을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 관짝에 들어가 누워 저런 인간과 연애를 했으니 욕먹어도 싸다. (심한 말)
그와 연애는 불안정했다. 그는 연락이 잘 되는 사람이 아니었고, 당시 국가시험을 준비하던 중이었기에 나는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 가끔 하는 데이트에는 식당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들어가서 그의 높은 위생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식당에선 다시 나와야 했고, 평균 3번째 식당에나 들어갈 수 있었고, 길거리 분식은 절대 먹을 수 없는 불결한 음식이었다. 나를 좋아한다 느낄 수 없지만 나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 내가 조금의 실수만 해도 이렇게 하면 헤어질 거야 하고 협박하던 사람. 나는 그를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불안전한 마음을 이어갔다. 그 속에서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처절하게 울었고 무너졌지만 그에게는 티 내지 않았다.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한 것은 그도 아니고, 그를 끊어내지 못하는 미련스러운 나 자신이었다. 내가 깊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불신했고, 마음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 채 반년의 연애를 이어갔고 갑작스레 끝났다.
그 이후 나는 나를 치유하기 위해 애썼다.
나의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심리학수업과 서적들을 읽어갔다. 다음에 만나는 남자는 무조건 나를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결심도 세웠다. 물론 그런 목표로 사귀었던 그다음 남자 친구도 그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밝혀두겠다. 20대 초반 나의 마음속 깊숙이에는 늘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불신은 항상 가지고 살았으니까
지금의 안정되고 성숙한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과의 연애는 그 후로 3년 뒤였다. 저런 마음을 갖고 살았던 것이 희미할 정도로 분에 넘치는 사랑과 안정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스쳐갔던 연애 상대든, 썸남이든 나의 연애 실패담은 나를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이 글쓰기는 참 유익했다. 실패한 인연이 전부라 생각하며 흐느껴 울던 밤들이, 이렇게 희미할지 모르고 그 시절 나는 얼마나 아팠나.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휑함도 결국은 나를 망치지 못하고 성장시켰다.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던 내가 얼마나 기억력이 좋지 못한 지 이번에 깨달았으니까.
어떤 추억은 힘이 세고, 어떤 추억은 희미하다. 그러니 지금 사랑이 힘든 당신도 그렇게 많이 아파하지 말길. 안 믿기겠지만, 시간이 다 해결해 주더라. 그리고 그런 사람이 결국에는 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