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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ug 22. 2022

"삶을 갈아넣은 뒤
최고가 되면 뭐하나"


 작년 10월부터 회사 메인뉴스에 매일 출연하고 있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하시던 코너였는데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뉴스 이면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이었다. 거의 매일 출연해야 했고 분야는 정해진 게 없었다. 내가 했던 주제들 몇 가지만 나열해보자면 '코로나 한번 걸리면 슈퍼 면역자인가?', '푸틴은 처벌할 수 있을까?', '검수완박은 위헌인가?' 등이었다.


 누가 나에게 어떤 기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는 '지식소매상' 노릇을 잘하는 기자라고 대답하곤 했다. 어려운 뉴스도 쉽고 정확하게 맥락을 풀어 전달하는 사람. 나를 담금질하기에 이만한 코너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다른 주제들을 소화해 3분 30초짜리 기사를 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인력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점심과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정신없이 자료 조사를 하다, 구내식당이 문 닫기 10분 전에 후다닥 도착해 밥 몇 숟갈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모든 걸 쏟아내면서 이 코너 창설 이래 처음으로 외부에서 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렇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면 뿌듯했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날이었다. 내 스스로 미심쩍은 부분, 검증이 덜 된 부분이 남으면 자책감이 심했다. 인력까지 더 구멍 나면서 난 더 망가져 갔다.  나는 내가 더 망가지는 방식으로 그 구멍을 메웠다. 회사 사정상 다른 방식으로 구멍을 메워달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전에도 깨작거릴 수밖에 없었던 밥은 더 먹지 못했다. 시간은 더 부족해졌기에 마감 시간을 낭떠러지처럼 만들고 나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붙였다. 늦은 밤 출연 끝에 퇴근하고 나서도 쉬기보단 내일 주제를 준비하다 잠에 들었다.


 대충, 내지는 하는 데까지만 하자고 마음속으로 수 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그게 안 됐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내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됐고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차라리 아파서 몸져누웠으면 하는 못된 마음이 더 자주 들었다. 뇌가 멈춘 듯 사고가 잘 되지 않고 멍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여름날 코로나에 걸리게 됐다. 매우 아팠지만 솔직히 기뻤다. 코너 압박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었다. 격리기간 동안 읽을 책들을 대거 주문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라는 책도 그중 하나였다. 읽다가 바리스타 민준의 얘기에 마음이 동요했다.


"민준은 커피를 내리면서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정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도 실력이 늘었다. 커피 맛이 좋아졌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이런 속도로, 이런 마음으로 성장해도 충분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고 바리스타가 돼서 뭘 하겠는가. 삶을 갈아 넣은 후에 최고라는 찬사를 받아서 뭘 하겠는가"


 이 문장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순 없었다. 나는 기자였기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말은 100% 흡수하기 어려웠다. 기사의 완성도 기준은 '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렇게 기사를 써도 되느냐, 아니냐'에 맞춰야 한다.


 대신 나는 뒷 문장을 더 빨아들였다. 삶을 갈아 넣은 뒤 최고라는 찬사를 받아서 무얼 하겠느냐는 것. 남들이 부러워하고 좋은 기회라지만 내가 나를 잃어버린 상태로라면 좋은 기사를 계속해서 써내기 힘들었다. 수준 낮은 기사를 납품하고 싶진 않았다.


 곧이어 인사이동 시즌이 왔고 나는 내 상태를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감사하게도 회사는 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코너에서 하차시켜 주셨다.


 지금은 다시 현업 부서에 소속되면서 1분 30초짜리 원고를 써내고 있다. 앵커를 내려놨을 때도 온갖 상념에 한동안 시달렸듯 이번에도 '나를 둘러싼 조건들이 조금만 더 나았더라면' 하는 상념들은 찾아왔다.


  나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내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 그리고 그 상념들도 관리해내는 것, 이게 이번에 해내야 할 것들이다. 높은 산만 바라보느라 그동안 못 쉬었던 숨을 이제야 편히 몰아 내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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