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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Feb 29. 2020

여행 대신, 바(bar)캉스

코로나 시국에서 잠깐 여행 떠나기  


 연신내 골목에 있는 바(bar)에 다녀왔다. 동네 속에 묻혀 있는 바는 어떤 모습일까. 철제 문을 밀고 들어서니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은 공간이 나왔다. 코로나 시국에도 제법 프로 혼술러들이 모여 있다.  바텐더랑 이런 저런 소소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이 있어(?) 보였다. 그 무리에 살포시 껴 보았다. 하루 내내 얼굴을 무겁게 짓눌렀던 마스크를 내려놓고 메뉴 판을 훑는다.


 소주, 맥주 모두 즐겨 하지만 바에 온 목적은 위스키였다. 좀 허세 같지만 고독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일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주, 맥주 말고, 마시려면 좀 돈이 들어가는, 그래서 한 모금 한 모금 소중하게 혀에 적셔야 하는 술이 당겼다. 친구가 예전에 위스키를 이렇게 칭했던 게 떠올랐다. "이런 술은 드라마에서 회장님이 빡칠 때 혼자 마시는 술이잖아." 맞다. 기업 회장님 기분을 내고 싶었다.


 글렌피딕 15년산을 골라 보았다. 술알못이 위스키를 마시면 하나씩 술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한데, 글렌피딕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엄 싱글 몰트 위스키로 '사슴이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란다. 스트레이트로 먹어볼까 하다가 온더록스(on the rocks)로 시도해 보기로. 노란빛 액체에 동그란 얼음 덩어리를 요리조리 굴려 본다. 독한 맛이 중화된다. 그렇게 쓰지 않아서 좋다. 천천히 음미하다보니 쨍한 위로가 된다. 실제로 위스키는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과 미국에선 의료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고 한다. 뚱뚱한 잔에 커다란 얼음을 일부러 소리 내어 달그락 달그락 거려 본다. 훌륭한 ASMR이다.


대기업 회장님 된 것처럼 마셔 본 위스키


 양이 너무 적다. 한 잔이 더 필요했다. 바텐더의 술 제조 과정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칵테일이 먹어 보고 싶어졌다. 단 것이 당겨서 피냐콜라다가 되느냐 물어봤더니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코코넛 믹스를 보관하는 비용이 꽤 든다는 것이다. 잔을 돌리면서 코코넛 가루를 핥아 먹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하고. 칵테일 하나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칵테일은 초콜릿 칵테일이라고 했다. 블랙커런트 리큐어와 초콜릿 리큐어를 막 섞어서 제조해준다. 우유나 탄산은 빼고 물로만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초코우유 맛이 난다. 이번엔 회장님 놀이 집어치우고 초등학생이 되기로. 맛있는 음료수를 빨대 꽂아 쪽쪽 마시듯 마셨다. 들이킬 때마다 딸가닥 딸가닥 얼음 소리가 경쾌하다.


금세 쪽쪽 빨아 마셨던 초콜릿맛 칵테일


 취기가 딱 적당하게 올라왔을 때쯤 바텐더가 다음 주부터 안주를 론칭한다면서 안주 몇 접시 시식을 권해 온다. 하나는 지독하게 짜고 하나는 지독하게 달았다. 솔직하게 품평을 해드렸더니 옆에서 '이렇게 과하게 짜야 사람들이 술을 더 사 먹지'라고 일침을 놓는다. 바텐더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코로나19 얘기가 나왔다. 원래는 이 시간은 굉장히 북적거릴 시간이라고 하셨다. 문득 바 내부를 둘러 보았다. 고급스럽게 치장한 공간에 취해 몽롱해져 있었는데 이곳 역시 소(小)상공인의 일터였구나 깨닫는다.



 꿀떡꿀떡 액체를 넘기면서 잔뜩 오감 놀이를 한 뒤 새벽이 돼서야 집으로 향했다. 호캉스나 여행은 못 떠나도 도심에서 즐긴 세 시간짜리 바(bar)캉스. 크지 않은 공간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도, 증오도, 위안도 실컷 하다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이 때의 '술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생각을 돌려보려고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첫 화면이 딸기 칵테일 제조 과정을 자랑하는 일본 바 사장님의 영상. 세상 일에 기진맥진할 때쯤 지갑 유출 단단히 각오하고 또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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