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 식탁에서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희뿌옇게 동이 터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새벽. 아영은 2년 후에 아일랜드에서 대출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말했다. 언니 집에서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아영은 우리가 함께 아일랜드에서 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상상한 이야기였다.
몇 년 전, 하동 섬진강에 두 가족이 함께 캠핑을 갔을 때였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아영이 말을 꺼냈다. 언니, 우리끼리 하동에서 살면 어떨까요? 남편들은 창원에 두고요. 아영은 다섯 아이를 하동의 작은 학교에 보내는 계획을 꿈꾸듯이 말했다. 어떻겠냐고 다시 되묻는 아영에게 말했다.
“밤마다 맥주를 많이 마시겠죠.”
우리는 섬진강에 돌을 던졌다. 첨벙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돌을 보면서 그 상상이 크게 이질감 없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지켜보던 우리의 두 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겠지’ 하고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지나가듯이, 농담처럼 ‘우리 애들은 프랑스에서 키워요.’라는 말을 했던 것도 아영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맥주를 마실 때. 우리는 일주일이 얼마나 근사한 텀인지 알아갔다. 일주일 동안 서로 겪고 보고 들은 기가 차고 황당한 일, 속상하고 어이없는 일, 쪽팔리고 웃긴 일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간혹 진지해졌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미래를 그릴 때였다.
때때로 아영은 더 바깥의 세계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보고 싶은 세계로 떠났다. 나는 아영을 통해 주어진 삶의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과감하게 조건을 바꾸는 능동성을 목격했다. 아일랜드에 와서 아영이 취업비자를 따서 살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들으면서, 매일 굴러가는 일상의 핸들을 단단히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동그랗게 물음표가 떴다.
나도 아영처럼, 아일랜드에서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대한민국 경남의 한 도시, 창원에서 사는 일에 대해서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삼 남매가 다니는 학교와 남편의 일터가 있는 곳이었다. 살아갈수록 정이 드는 동네였다. 운 좋게 좋은 이웃과 친구도 사귀었다. 이곳이 내 삶의 조건이고 터전이라 자연스럽게 믿었다.
“언니, 이민자의 삶이 녹록지 않아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어. 근데 자유로워요.”
아영은 자신의 독립적인 성향과 아일리쉬들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마치 ‘어디에서 살 것인가’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와 같았다. 어떤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지독히 느린 행정과 불편한 교통의 아일랜드, 급격히 빠른 사회변화와 경쟁이 치열한 한국. 그리고 세상에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새롭게 깨달았다.
“나도 정말 아일랜드에서 살 수 있을까요?”
오락실이 있는 펍에 간 날이었다. 커피와 위스키가 섞인 아일리쉬 음료를 마시면서 불안한 설렘을 토했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면 떠나지 못해요.”
유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른여덟 살로 나와 동갑인 유라는 다국적 기업의 정규직으로 일했다. 물론 처음부터 외국살이가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아일랜드에 와서 설거지부터 신문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일자리는 있다고도 말했다. 유라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다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애인을 만나고, 집을 사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며. 어느새 이민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수미 씨, 8개월만 살아봐요. 학생 비자를 받는 팔 개월만. 안 되겠음 돌아가면 되죠.”
내가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를 먹구름 같은 걱정에 시름할 때, 유라는 그나마 가볍게 실현 가능한 일들을 알려줬다. 그리고 만약 아일랜드에서 세 아이를 키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자신이 가디언(보호자)이 되어서 돕겠다고도 했다. 유라의 제안이 술김에 나온 호기로움이라 생각했지만, 이후에 아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마이클에게도 수미와 로니가 아일랜드에 올 수도 있다고 전해줬다고 했다.
“일단 로니와 수미만 먼저 와요. 아일랜드에서 취업한 후 그다음 쌍둥이를 데려와요.”
꽤 구체적인 방법의 제시였다. 내게는 아일랜드에서 살기 위한 방법이 있었다. 조력자도 있었다. 방을 구하는 동안 유라의 집에서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그리고 부딪히듯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동네 시장에서 사 먹는 두부와 창원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한글로 쓴 글로 존중받는 작은 세계와 쌍둥이 아들, 남편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가능성이라는 말이 고통처럼 느껴졌다. 가보지 않은 길이 있다. 길이 보여도 성큼 가보지 못하는 고통에 마음이 끝도 없이 부대꼈다.
그날밤. 내가 고민 없이 선택한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눈앞의 맥주를 몽땅 마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