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 있는 20일 동안 감기몸살이 난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맥주를 마셨다. 물보다 맥주를 더 마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한하게 숙취가 없었다. 내 삶에서 술고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나날들이었다. 매일 술을 마신 이유를 대보자면 해가 너무 길었고(밤 아홉 시까지 뭘 한단 말인가), 맥주가 들어가지 않으면 마음이 부대꼈다. 오죽하면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세상이 똑바로 보인다고 말할 정도였다. 다인원의 집단생활에서 오는 피로, 이민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한 잔 술은 별거 아니게 했다.
아영은 이래나 저래나 어차피 눈치 보이는 거 편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 같았다. 어차피 보이는 눈치, 편하게 있으라니.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언니의 집에 친구(와 친구의 자식)까지 초대한 아영이니까 가능한 말이었다. 아영은 멀리 한국에서 친구가 왔다는 걸 빌미로 저녁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자 했다. 한국인 자매와 한 명의 아일리쉬는 정확히 역할을 분업해서 살고 있었다. 유라는 청소, 마이클은 주말 나들이 계획, 아영은 식사 준비를 했다. 하루쯤은 한국에서처럼 치킨 시켜 먹으라고 말하고 싶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아일리쉬는 배달의 민족이 아니었다. 그래도 집에 쌓인 라면과 컵라면이 있었다. 하루쯤은 대충 먹어도 될 일이었다. 아영은 한국에서 온 친구를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불금, 가뿐하게 밤나들이에 나섰다.
나는 아영이 퇴근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티를 걷다가 발견한 한적한 펍이었다. 아일랜드에 와서 인종차별을 딱히 겪지 않은 건 외국인보다는 소비자의 정체성이 컸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래도 상품을 구입한 사람에게 인상 쓰진 않으니까. 나는 고객으로 존재하는 한 적당히 안전하다고 느꼈다.
“비미쉬(아일랜드 흑맥주) 원컵, 플리즈.”
이토록 짧은 영어로도 맥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옆에 선 여자가 빙긋이 웃었다. 나는 야외테이블에 앉아 비미쉬를 들이키며 책을 읽었다. 리베카 솔닛이 쓴 아일랜드 여행기였다. 미국인이지만 그는 아일랜드 국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양 조부모가 아일랜드 이민자였던 것이다. 먼 핏줄이 준 자신도 몰랐던 인생의 선물로, 내가 가질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취업 비자를 따기 위해, 혹은 학생 비자가 있어야만 아일랜드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나와 비교해 그는 대단한 걸 가진 사람이었다.
한참 리베카 솔닛의 아일랜드에 대한 깊은 응시와 사유에 심취하다 왜 같은 걸 봐도 이렇게 표현이 다를까...라는 뼈아픈 자기 성찰로 이어질 무렵. 맞은편에서 아영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일랜드에서 아영을 만난다는 게, 때때로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이 익숙해질 때쯤에는 다시 헤어지겠지. 이 미래의 씁쓸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라도 나는 또 한잔 마셔야 했다.
우리는 코크 시내에 있는 새로운 펍을 향해 걸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별세계가 펼쳐졌다. 마치 호그와트처럼, 밖에서 볼 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 어두컴컴한 실내의 문을 또 한 번 통과하면 야외 테라스가 넓게 펼쳐졌다. 아일랜드에서 저녁 여덟 시는 여전히 밝았고 햇살을 찬양하며 우리는 술을 마셨다. 테이블 곳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술 마시는 아일리쉬들 틈에 나란히 앉은 동양인 여자 둘. 아영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도 되지만 굳이 옆에 앉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커플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영은 나의 잔머리를 손으로 넘겨주며 말했다.
“언니가 아일랜드에 있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해요.”
“매일 혼자서 오던 퇴근길을 같이 갈 수 있어서 좋아요.”
“너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언니가 집에 있으니까.”
“가게 직원들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어보길래, 4년 동안 친구가 없다가 사귄 친구라고 말해줬어요. 러블리한 관계래요.”
“언니랑 있으면 용기가 나요.”
한 시간 동안 아영은 로맨틱한 말을 태연하게 쏟아냈다. 사실 아일랜드에 가기 전부터 나는 우리 우정이 실은 우정을 빙자한 로맨스는 아닐까 고민했다. 남편 또한 ‘한 사람을 보기 위해 아일랜드까지 가는 일’에 대한 의구심을 슬쩍 표현하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우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 역시 너무 이성애에 익숙한 나머지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우리는 멋지게 차려있은 남자를 보면 순수하게 눈이 돌아갔고, 영국의 한 공원에 앉아 영국 남자들의 스타일에 대해 칭송했다. 깔끔한 와이셔츠와 슬랙스를 입은 남자들의 퇴근길은 런던아이보다 더 가치 있는 풍경이었다. 페스티벌에 가선 칵테일을 파는 청년의 미소에 화답하듯 결제를 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천년의 헤테로였다. 우리가 헤테로든 레즈비언이든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술이었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셨다. 아영은 멀리서 온 친구 찬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듯(아영은 평일에만 출근했다.) 세 번째 펍으로 향했다. THE VIXARSTOWN BAR라는 곳으로.
“언니, 페스티벌 갈 때 부츠를 신어야 한 대요. 땅이 질어서.”
“닥터마틴 같은 거 말이죠.”
어느새 아일랜드에 도착한 날로부터 여러 날이 지났고, 우리에겐 하이라이트처럼 페스티벌이 남아있었다. 페스티벌이라고는 고기 페스티벌, 고추 축제밖에 가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이 선택한 곳은 밤새 이어진다는 음악 축제였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착장을 계획했다. 머리에 핀도 꽂고, 화려한 깃털 귀걸이도 하자고 했다. 돈이 없으니 컵라면과 캔맥주는 적당히 챙겨가자고 했다. 역시 돈을 아끼기 위해 텐트에서 자자고 했다. 가난도 낭만으로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마치 우리의 가까운 미래는 오로지 낭만으로만 가득한 것 같았다.
다채로운 개고생을 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