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비둘기, 아-스팔트 위에서

3막. 보름


찌르르르 잿빛 한 마리 내 쪽으로 미끄러진다 // 나는 두 걸음 물러서 숨을 얇게 접는다 // 먼지가 목구멍 앞에서 엎드린다 // 이차선 가운데 겨울빛 아-스팔트가 젖은 비늘처럼 드러눕고 비둘기는 그 비늘을 쪽쪽 찍는다 // 보이지 않는 먹이를 더듬는 부리의 리듬이 바닥의 점들을 깨운다 // 멀리서 바퀴의 숨이 밀려온다 // 선의 피부가 낮게 눕는다 // 비둘기의 눈동자가 내 그림자를 한 번 훑고 지나간다 // 그림자는 선처럼 굳어 몸의 끝을 표시한다 //


새는 멈춰서 내 발끝을 택배 상자처럼 들어 올려 본다 // 들리지 않는 무게가 발목에서 흔들린다 // 나는 눈을 들지 않고 발바닥으로 선의 온도를 더듬는다 // 선은 식었다가 미세하게 데워졌다가 다시 식는다 //


비둘기는 훌쩍 떠올라 선의 길이를 따라 짧은 곡선을 긋고 내려와 내 그림자의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린다 // 먹을 수 있을 만큼 두꺼운지 알 수 없는 검은 가장자리 // 새의 눈 안쪽에는 작은 도시가 점처럼 박혀 있다 // 전깃줄과 바퀴와 선과 숨이 겹쳐 흔들리고 그 속에서 빈 곳이 반짝이면 부리가 내려간다 // 나는 목덜미에서 낮은 전류를 듣는다 // 비둘기는 내 어깨를 기둥으로 본다 // 기둥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배웠을 것이다 // 그래서 새는 내 옆을 원을 그리며 돌아 나와 다시 선 위에 내려앉는다 // 바람이 갈빗살 사이를 더듬고 아-스팔트의 살결이 저녁빛으로 바뀐다 //


멀리 가는가 싶더니 새는 곧장 돌아와 내 그림자 끝을 한 번 더 찍는다 // 그림자는 먹이가 되지 않는다 // 그럼에도 찍는 손놀림이 익숙하다 // 나는 발을 아주 조금 옮겼다가 멈춘다 // 선은 어제의 선과 닮아 있고 오늘의 선은 내일의 선과 닮아 있다 // 비둘기는 바닥을 본다 // 나는 비둘기의 눈을 지난다 // 서로의 모양이 잠깐 뒤집혀 보이는 순간 서로의 하루가 천천히 겹쳐 앉는다 // 그리고 우리가 밟는 곳은 같지만 밟히는 방식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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