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Confrontation] 거울 저편 1

1막. 광증


1막

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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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가 이상했던 건 아니다. 시작은 사소했다. 어느 날 아침, 정장 대신 잠옷을 입고 나갈 뻔했다. 몽롱한 정신, 지각 걱정, 어젯밤의 야근… 이런 아슬아슬함 때문에 생긴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일까.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점점 더 ‘이상’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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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모처럼 휴일이니까 침대에서 농땡이 좀 피우려 했다. 그런데 몸 위에 이상한 게 있다. 나의 따뜻한 솜이불이 아니라, 무언가 가볍고 차가운…. 몸 위에는 이불 대신 종량제봉투가 있었다. 종량제봉투를 붙잡고 이게 무슨 영문일까 곰곰이 생각한다. 어제 내가 술을 마시고 잤나. 그 정도로 내가 만취했었나.

핸드폰은 어디 있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핸드폰을 찾는다. 진동 소리가 느껴지는 걸 보니 전화가 온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식탁 위 고구마가 덜덜 떨린다. 마치 진동 소리의 주파수처럼 일정하게. 어라, 내가 잠이 덜 깼나. 고구마를 만져보니 핸드폰으로 바뀌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엉뚱하다. 어떻게 하면 핸드폰을 고구마로 잘못 보지?


그날 하루는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치약인 줄 알고 짰더니 고추냉이였다거나. 시계를 찼더니 대파가 손목에 둘러져 있고. 집 밖을 나섰더니 하늘에는 태양 대신 별사탕이 떠 있었다. 사람들은 통닭을 바닥에 질질 끌고 걸어 다녔다. 아마 개를 산책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하나씩 사실과의 괴리를 느낄 때마다 모든 것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다행인 건, 사람은 그대로 보인다는 거였다. 만약 사람마저 알아보지 못했다면, 나는 걸어 다니면서 풍선과 삐에로, 통닭과 바오밥나무, 귀신과 아이언맨, 그런 걸 만나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날이 꿈인 줄 알았다. 자고 일어나면 현실로 돌아올 꿈, 그런 게 아닐까라고 믿었다. 그래서 심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인식’과 ‘사실’이 다소 엇나가있는 순간이라고. 마치 소설 속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처럼 이 순간을 즐겼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와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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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다행히 몸 위에는 이불이 있었다. 휴, 정말 꿈이었을 뿐이야. 그런데 ‘또’ 촉감이 무언가 이상하다. …이번엔 스티로폼이었다. 그리고 벽지는 무지갯빛 솜털로 바뀌었다. 어제의 ‘꿈’처럼 지금도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오늘은 출근해야 하는데 어쩌지.


결국 정장―처음에는 우비로 보였던 무언가―을 입고, 구두―원래는 짚신으로 보인 것―를 신고 출근길에 나선다. 신호등은 막대 사탕이 되어 있고, 내 차는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가 됐다. 과연 내가 차를 끌고 무사히 회사까지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운전하다가 막대사탕처럼 생긴 신호등을 보고 어떻게 직진 신호를 알겠는가. 버스를 타기로 결심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라면, 병가를 쓰는 걸 추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우리 회사는 대기업과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사님께서 회사의 사활이 달린 일이라며 셀 수도 없이 독촉했다. 우리 팀 팀장은 임원진들과의 회의 때문에, 가뜩이나 없는 머리가 더 빠질 것 같단다. 내가 지금 당장 병가를 쓰겠다고 하면 분명 한 소리 듣고 말 거다. 아니, 한 소리로 끝나면 다행이다. 곧 승진 심사다. 그렇기에 오늘은 당장 병가를 쓸 수는 없다. 그래도 회사는 다르지 않을까. 회사는 아무래도 긴장해야 하는 공간이니까, 내 ‘착각증’도 한결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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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이럴 거면 병가를 쓸 걸 그랬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모든 서류가 휴지 덩어리로 보여서, 어떤 서류를 넘겨줘야 할지도 헷갈렸다. 다행히 유심히 보면 무슨 서류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업무 속도가 현저히 늦는다고 한 소리 들었다. 부장님 커피를 탈 때는 뭐가 커피 가루인지 몰라서 실수로 소금물을 타갔다.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했지만, 어떻게 말하겠어. 내가 지금 ‘착각증’에 걸렸다고. 말한다고 해서 볼펜이 오징어다리로 보인다는 걸 믿어는 줄까. 나를 미친놈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하.. 시간 날 때 하루라도 빨리 병원이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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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회사에서 발표가 있었다. 대차게 말아먹었다. 포인터인줄 알고 급하게 들고 온 무언가가 사실 라이터인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꼬였다. 부장님, 이사님, 상무님까지 오신 자리였지만 내 실수로 다 꼬여버렸다. 평소 깐깐하던 부장님도 내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병원을 가보라고 권유하셨다. 그래서 내일은 병원을 가볼 예정이다. 병원에서는 부디 내 ‘착각증’을 해결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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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갔다. 하지만 의사도 뭔지 모르겠는 눈치다. 머리에 이상한 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검사도 했다. 그런데 무슨 병인지 모르겠단다. 영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의사 역시도 속 시원한 답을 내려주지는 못했다. 무슨 완화제? 하나를 처방하는 게 끝이었다. 그 약마저 먹으면 먹을수록 내 ‘착각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먹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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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내 ‘착각증’은 낫지 않았다. 왜일까. 회사에서도 또 혼났다.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소리 들었다. 나도 내가 마냥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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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차라리 좀 쉬다 오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다. 회사마저 안 나오면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 그게 더 안 좋을 거 같았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병가 14일, 연차 14일을 써서 1달을 쉬고 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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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약을 먹어봤다. 별 소득 없었다. 이럴 줄 알면서도 괜히 희망을 붙잡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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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집에 한 번 찾아오라고. 반찬 떨어지지 않았냐고. 그런 상투적인 걱정이었다. 가고 싶지만… 엄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기에,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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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광증’은 날이 갈수록 나을 낌새가 안 보인다. 만약 이 일기마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 온다면, 미쳐버리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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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 방은 대환장 파티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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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다.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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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떡볶이. 참깨. 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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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증’이 걸린 날로부터 약 3주하고도 3일째. 이제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지경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 환각인 건지, 나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일기를 쓰는 이 시간마저도, 알고 보니 일기가 아니라 콩나물을 썰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점점 더 현실과 착각의 간극이 흐려지자, 이게 환각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찾는 게 아니라 고구마를 찾는다. 연필을 찾는 게 아니라 오징어다리를 찾는다. 낯설었던 일상에 점점 익숙해지는 걸 느끼자, 불현듯 자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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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이제는 사람마저 다르게 보인다. 쌀이 다 떨어져 오랜만에 마트로 나가던 순간,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그 안에 사람 크기의 토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고 보니 다행히 윗집 아줌마로 바뀌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어졌다. 물건까지는 어떻게든 버틸만했다. 그러나, 사람마저도 ‘광증’ 때문에 다르게 보인다면, 나는 과연 ‘인간’으로서 생활할 수 있을까? 마치 파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듯, 나도 남들에게는 파리 같은 벌레로 여겨지지 않을까.


그래서 이 일기를 끝으로 나는 살지 않기로 했다. 유언에 쓸 말은 없다. 단지 내가 왜 죽게 됐는지 우리 가족만큼은 알아야 할 거 같으니 일기 정도는 남기도록 하겠다. 엄마, 생명보험 들어놓은 거 있으니까 꼭 보험금 수령해야 해. 내 동생, 대학교 졸업하는 거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 아빠 곁으로 먼저 가는 나를 용서해 줘,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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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미역 줄기―원래는 줄이었던 것―를 매단다. 바위덩어리—의자—에 오른다. 눈을 감는다. 발을 바위 아래로 떨어트린다. 그때였다. 벨레레레레레—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들린다. 엄마였다. 윽… 엄마.. 전화 못 받으면 걱정할 텐데..

툭— 쾅!


미역이 끊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미역을 매단 고리가 떨어졌다. 콜록콜록! 죽음이라는 게 만만치 않다. 우선 엄마의 전화를 받아야겠다.

“여보세요?”

“응,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연락했지.”

“바쁘다니깐..”

“언제 한 번 못 내려오나? 너 좋아하는 열무김치 맛있게 익었는데.”

“시간 되면 갈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난 잘… 지내니까..”

“목소리 안 좋은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은.. 일 없어. 너무 바쁘다! 하루에도 전화만 몇 통 받는지! 곧 연락 올 거 같은데 먼저 끊을게.”

“어우야, 그래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사랑해~”


뚝.

엄마의 마지막 말에는 답하지 못했다.


“나도 사랑해..”


곧 죽을 자식의 사랑을 듣고 가기엔, 너무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아닌가. 자식이 먼저 가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지게 아프려나. 어쩔 수 없다. 지금 내 광증이라면, 엄마의 얼굴도 어떻게 보일지 모른다. 내가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선택은, 이 방법밖에 없다. 나의 구원을 위해 다시 한번 발을 떨어트리려고 할 때.


- 과연 그럴까?


이제는 환청마저 들리나 보다.

- 환청이 아니야. 난 너를 낫게 만들 수 있어.

미역 줄기를 잡았던 두 손을 놓는다. 마음 한 켠에는 괜한 희망이 올라온다. 소리가 어디서 나는 거지? 안방이었다. 내 광증을 치료할 수 있다니, 가능만 하다면 난 원래대로.. 이건 환청이 아닌가? 부디 환청이 아니기를. 신께서 나를 위해 구원의 손길을 내려준 것이시길.


- 그래. 환청 아니라니까. 그렇다고 신은 아니긴 해. 이대로 죽기에는 아쉽지 않니? 한 번만 날 믿어봐. 네 방으로 와.

방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방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그 사이에, 못 보던―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안 보이던― 거울이 보였다.


- 드디어 봐주네. 안녕.

“넌 누구야..?”

- 제대로 한 번 봐봐.

오랜만에 본 거울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두렵다. 만약 거울에 비친 나마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 거다. 럼에도 하찮은 희망 한 줌을 버리지 못해 거울 앞에 선다. 막상 고개를 들어 보지는 못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 관문인 것 같아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 너, 병원을 가도 그대로였지? 지금 나를 봐야 할 거야. 그래야 난 너를 구해줄 수 있어.


마치 나를 설득하듯 거울은 계속해서 말을 건다. 그래. 용기를 내보자. 어차피 손해는 없어. 기어코 난 고개를 든다. 눈을 크게 떠 거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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