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Confrontation] 거울 저편 3
2막. 직면
by 나는 달을 건너는 중입니다 Feb 22. 2026
2막
직면
정장을 입는다. 시계를 찬다. 우비도, 대파도 아닌 진짜 정장과 시계다.
오랜만에 출근이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 아직 많은 걸 말해줄 수는 없어. 확실한 건, 네가 주기적으로 거울을 봐줘야 세상 모든 걸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날은 참 신기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거울 안에는, ‘나’와 닮으면서도 낯선 사람이 안에 있었다. 거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나를 전혀 따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해 보였다.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별다른 대화를 할 틈도 없었다. 그는 ‘반드시 1시간마다 한 번씩 거울을 봐야 한다’는 말과 ‘보름달이 뜨는 날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방이 진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은 핸드폰, 침대는 침대, 책상은 책상. 모든 게 원래의 그 자리,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안도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도와준 것에 감사했다.
다시, 회사 앞. 객관적으로 1달은 길다고도 짧다고도 말할 수 없는 시기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길었다. 회사까지 오는 모든 길이 어색했고, 반가웠다. 혹여나 아직 나의 ‘광증’이 다 낫지 않아 물건들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후배 여사원 ‘은혜’가 말을 걸었다.
“대리님?! 오늘부터 다시 출근하시는 거예요?”
“오랜만이야, 은혜야.”
“와, 대리님 안 계실 동안 얼마나 바빴는데요.”
“미안해. 내가 오늘 밥 한 끼 살게. 어차피 팀원들한테 한 번씩 밥 사려고 했어.”
일상. 맞다. 이런 게 일상이다. 남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그리웠던 순간이다.
오늘은 정말 바쁘게 돌아갔다. 1달 동안 자리를 비우느라 생긴 업무들을 팔로우 업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곧 경쟁사와의 발표가 잡혀있다며 그것마저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정말 즐거웠다. 바쁨보다는 일상으로부터 얻는 기쁨이 더 컸기에. 일상은‘일상’이기에 소중하다는 걸, 근 한 달 동안 느낄 수 있었다.
거울은 1시간 주기로 꾸준히 봤다. 처음에는 휴대폰에 비친 화면이나 카메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걸 시도하자 노트북이 청경채로 바뀐 걸 보자마자 화장실로 가 거울을 봤다. 다행히 거울을 볼 때마다 어떤 ‘약효’가 드는 것인지, 금방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퇴근하고서는 보이는 화장품 가게에 바로 들어가 거울 하나를 샀다. 손 크기만 한 사이즈였는데,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작은 거울이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꺼내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뭐 어떤가. 광증에 걸린 사람보다야 낫지.
시간이 날 때마다, 거울 속 그 존재는 무엇일지 고민해 보기도 했다. 신은 아니라고 했으니 그걸 제외하면, 귀신인 걸까. 설마 1달 동안 거대한 꿈을 꾼 건 아닐까도 싶었으나, 그럴 리 없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올라오는 병이, 지금이 현실임을 정면으로 주장한다.
엄마한테도 찾아갔다. 본가에는 정말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오라고 등짝을 맞았다. 엄마한테 내 증상을 말할까. 아니다. 아직 완벽하게 낫지도 않은 병을 엄마에게 말했다가는, 괜히 걱정만 살 수 있다. 엄마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가족의 동의하에 정신병동에 입원시킬 수도 있다고 하니까. 최대한 조심하자. 동생은 대학교 마지막 학기로, 지금 한창 취업 준비 중이라고 했다. 옛날에 내가 인턴으로 다닌 회사에도 서류를 넣었다는데, 광탈했단다. 그치. 네가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아직 네 스펙으로는 그 회사 못 들어가. 한참 동생을 놀려주자,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그 ‘미역 줄기’로 자살을 성공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가족들이 발견했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내가 아플 때는 막상 생각하지 못한 뒷일들이 이제야 좀 그려진다. 자식 장례식에서 처량하게 앉아 있는 엄마,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속은 다 망가졌을 우리 동생. 몹쓸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너무나 죄스러웠다. 그렇기에 거울 속 그에게 고맙다. 그때 죽었다면 일상과 가족을 누리지도 못하고 싸늘하게 식어갔겠지.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는 말은 꼭 해야겠다.
-
일상은 일상이기에 소중하다는 사실을 느낀 지 한 달이 조금 안 됐을까.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어떤 말을 할지 다듬고 고민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 1달 뒤에 그를 볼 수 있을 거다. 연인도 아니고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아마 대학교 합격 발표 빼고는 처음 같다. 아니지, 굳이 따지면 전 연인인데,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만약 안 나타나면 어쩌지. 그러면 나는 평생을 내 증상의 정체도 모르고 보내야 하는 건가 싶다. 아니, 이런 잡스러운 생각은 그만하자. 모든 건 오늘 밤 ‘그’가 답해줄 테니까.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오늘치 업무는 진작에 끝났다. 그런데 나는 퇴근하지 못한다. 주위 사원들은 하나둘 다 퇴근하는데, 나만 자리에 남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저 망할 놈의 부장 때문이다. 부장이 퇴근 1시간 전에 당장 내일 아침까지 내야 할 서류를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아, 정확히 말하면 부탁이 아니라 지시지. 그래서 꼼짝없이 야근행이었다.
“대리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옆자리 은혜가 막상 칼퇴근하기에는 눈치가 보였는지 내 옆을 기웃거린다. 마음 착한 은혜. 그래도 내 손에 넘어온 순간, 나의 업무가 되는 건데 그걸 후배한테 떠넘길 수는 없다. 후배 사원에게 내 일을 시키면 방금 욕한 부장이랑 다를 게 뭔가.
“괜찮아. 곧 끝날 거 같아서. 좋은 밤 보내!”
“그러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은혜가 쭈뼛쭈뼛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이 넓은 사무실에 나 혼자만 남았다. 그리고 거울을 봤다. 그가 나타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직 보이지는 않는다. 설마, 내 방 거울에서만 나타나는 건가? 그러면 새벽은 되어야 볼 수도 있을 텐데, 불안하다. 아니다. 분명 보름달이 뜨는 날에 온다고 했지, 그 거울을 봐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거면 어떤 방식으로도 만날 수 있다는 뜻일 거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열린 창문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보름달이 밤하늘에 만개했다. 달은 태양빛을 훔쳐 밤 아래 도시들을 비춘다. 옛날에는 달이 부정적인 신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반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보름달이 뜬 날에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같은 달임에도 불구하고 바라보는 마음가짐은 전혀 달라진 게 정말 신기하다. 옛날 사람들이 우매해서 그런 걸까. 그건 아닐 거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일상에서 모두가 달을 나쁘게 봤으니까, 나쁜 달이 일상이 된 거다.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일까. 달이 나쁘다고 여겨서 일상이 된 걸까, 아니면 일상에서 달을 나쁘다고 여긴 걸까.
하하, 밤이 되어서 그런가, 다소 감정적이다. 그래, 이제 때가 됐다. 보름달이 중천에 오른 지금, 거울을 보면 아마 그가 있을 거다. 새로운 진실을 직면하기 위해서, 나는 조그마한 거울을 들어 나 자신을 바라본다.
- 안녕? 기다렸어?
정말 그가 내 눈앞에 있다. 거울의 상식을 깨트려버리듯, 거울 속에는 나는커녕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다렸어. 오늘만을.”
- 그래.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다 물어봐.
“…너는 뭐야?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정체가 뭐야?”
그래.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 거울이 거울을 아니게 만들지만, 일상이 아닌 것을 일상으로 만들어주는 존재. 신은 아니지만 세상 만물을 제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존재. 내게 있어 하염없이 고맙지만, 정체는 하나도 모르는 녀석. 이 녀석의 정체를 아는 게 제일 급선무다.
- 오, 한 달 동안 고민한 질문이 그거야? 신기한데..
“난 네가 더 신기해. 너는 신이 아니라고 했지. 그러면 귀신인 거야?”
- 하하, 웃기네. 귀신도 일종의 신이야. 단지 사람들이 귀신을 신이라고 여기지 않을 뿐이지. 그렇다는 건 나는 귀신도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면 뭔데?”
막힘없이 말을 내뱉던, 거울 속 그 녀석이 한참을 뜸 들인다. 우리 사이의 정적이 다소 차갑다. 그렇다고 재촉할 수도 없다. 나는 일방적으로 그에게 종속되었으니까. 만약 그가 마음을 바꾸어 내 광증을 다시 도지게 한다면, 다시 한번 죽음을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렵게 입을 뗀다.
- 나는 너야.
“그게 무슨 소리야.”
- 네가 거울을 봤는데 거기에 비친 게 네가 아닐 수 있겠어? 거울을 보려면 반드시 나를 직면하게 되어 있어. 즉, 거울 속 모든 건 너라는 거지.
말장난이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본인의 정체를 밝히기 싫은가 보다.
“알겠어. 그러면, 내 증상은 어떻게 된 거야? 왜 내가 이런 병을 앓게 된 거고, 너는 어떻게 낫게 해준 거야?”
- 병이라.. 그래, 병이라고 말하는 게 많나 싶지만, 맞다고 치고, 네 병의 증상은 현실을 직시할 수 없던 거야.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과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없던 거지. 세상 모든 사람은 제대로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심지어 본인마저도. 이건 사담이고, 어쨌든, 단지 그때의 네가 세상과 다소 멀어져 있던 게 아닐까?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라. 저것도 말장난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내 병이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니. 맞는 말이다. 당시 나는 일상 속 모든 물건을, 마치 회로가 꼬인 것처럼 이상하게 봤었으니까 말이다. 일상을 세상으로 본다면, 나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었던 게 맞지. 그럼에도, 무언가 진실과 한결 멀어져 있는 느낌이다. 세상과 다소 멀어져 있는 게 아닐까는 저 녀석의 말처럼, 지금 진실도 한 걸음 뒤에 가려져 있는 거 같다.
- 내가 널 어떻게 낫게 해준 거냐면, 딱히 뭘 한 건 아니야. 그냥 네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조금 손을 쓴 거일 뿐이지. 매개체가 거울일 뿐이야.
“이상하잖아. 1시간마다 거울을 봐야 한다니, 내가 백설공주도 아니고 말이 돼?”
- 말이 안 되는 건 없어. 그리고 말이 안 되면 어쩔 거야? 너한테는 다 말이 되는 건데. 누가 너의 광증을 인정해 주겠어. 너한테는 진짜 진실이라면, 그게 너의 일상 아닐까?
“음…. 그러면 앞으로 평생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야? 공주병 걸린 사람처럼 수시로 거울을 봐야 하는 거고?”
한 달을 기다린 거치고는 속 시원한 답변이 안 나온다. 살짝 불만 섞인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 그건 아니야. 언젠간 낫게 될 거야. 그 방법은 천천히 알아갈 거고.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그나마 다행이네..”
낫는다니 다행이다. 오늘 들은 말 중 제일 기쁜 소식이다.
- 아, 갈 때가 됐어. 아직은 오래 못 있거든. 오늘도 예상보다 오래 있었어.
벌써 간다고? 아직도 보름달이 떠 있는데? 물어볼 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간이 없으니 떠오르는 게 없다. 어쩌지, 뭘 물어보지?
-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아, 무슨 말 해야지? 왜 보름달이 떠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건지 물어볼까? 아니면 거울을 계속 안 보면 너를 볼 수 없는 건지? 짧지만 긴 고민 동안 한 마디를 떠올렸다. 그래,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네 정체도 모르고, 결국 이렇게 금방 가버리지만, 할 말은 있어.”
- 오, 뭔데 뜸 들여?
“고마워. 너 덕분에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 ….
아무 반응도 없다. 머쓱하게. 예상치 못했는지 입을 뻐끔뻐끔 거릴 뿐 그 사이에서는 소리가 나올 기미가 없다. 당연히 고맙지. 내게 일상을 선물해 줬는데, 그 누구라도 고맙다고는 했을 테다. 보자마자 고맙다고 했어야 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놓치고 만 거였다.
- 흠.. 네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꽤 변했나 보네. 그래. 고맙다라. 알겠어. 그러면 내가 하나만 더 말해줄게. 다음 만나는 날은 보름달이 아닐 거야. 조금 일찍 찾아올게.
그 말을 끝으로, 그 녀석은 사라졌다. 거울 안에는 나와 내 뒤의 물건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일찍 찾아온다는 건 언제이고, 이상해진다는 건 무슨 뜻인지. 그가 다시 올 때까지 고민할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갔다. 그리고 왜인지 공허하다. 알아간 건 없다는 게 공허함을 만들었지만, 그 공허를 더 키운 건 다른 거 같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른 이들은 일상 속에서 겪지 못할 이 순간이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보고 싶다, 저 녀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