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Confrontation] 거울 저편 7
4막. 집착
by 나는 달을 건너는 중입니다 Feb 26. 2026
4막
집착
그날 이후로, 거울엔 네가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선을 넘은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싫었던 걸까?
다시 광증이 도진다. 휴대전화는 고구마로, 신호등은 막대사탕으로. 저번과는 달리 나마저 올빼미로 보인다. 이제 거울을 봐도 환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너를 본 동안의 순간들이 나에게 환상이듯, 네가 없는 거울을 보아도 더 이상 사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회사에는 병가를 냈다. 잘릴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태로는―네가 없는 그곳에선― 더 이상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단지 이제는 죽을 용기도, 살아갈 용기도 없는 내가 지탄스러울 뿐이다.
거울을 본다. 거울에는 네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거울은 투영의 도구가 아니라는 듯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아니, 나만이 보이기에 진정한 투영인 걸까. 거울의 존재 의미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너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날의 일을 사과할 수 있을 텐데, 여전히 너는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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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지날수록 나 스스로가 붕괴하는 게 느껴졌다. 내 겉모습이 하루에도 수십 번 모습이 바뀌었다. 와인잔부터 의자, 허수아비, 소화기, 소나무… 특별한 규칙 없이 자주 바뀐다. 가끔은 바뀐 내 모습에 몰입된 적도 있었다. 내가 허수아비일 때는 하루 종일 서 있었다. 본디 허수아비는 밭 위에서 평생을 서 있는다. 다리가 아픈 것도 모른 채로 서 있다.
이제 밖으로 나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세상이 정말 낯설게 느껴지는데, 그냥 그대로 두었다. 이전에 광증에 걸렸을 때는 저 사물이 무엇일까 끝없이 쳐다봤지만, 이제는 냅뒀다. 걸어가면서 비둘기나 독수리, 타조, 참새와 부딪혀도 그냥 걸었다. 아마 여기가 너와 함께 걷던 그 산책길이겠거니 생각하면서 걸었다. 내게 남은 두려움은 너뿐이다.
그래도 거울만큼은 그대로 보인다. 거울은 다른 사물로 변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네가 나를 옆에서 쳐다보는 듯, 내 주위에서 꾸준히 나를 염탐했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거울이 많더라. 화장실, 옷 가게 앞, 지하철 계단, 화장품 가게, 공원, 차 옆… 얼마나 사람들이 본인에게 관심이 많은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곳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오히려 ‘나’와 점점 더 멀어졌다. 네가 예전에 말한 것처럼 거울은 타자로서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랬는데, 거울에 더 이상 내 ‘진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건 타자로서 나를 만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타자를 바라보는 나인 걸까. 거울에서 ‘나’를 찾지 않고 너를 찾는 건 모순인 걸까.
무심코 문어와 부딪혔다. 그러자 가슴팍에 넣어둔 거울이 떨어지며 쨍그랑 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이 거울은 광증이 나은 뒤 처음 산 거다. 그때는 1시간마다 집착하듯 거울을 쳐다봤다. 다시는 광증에 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와 점점 더 깊어질수록 내게 그것은 너와 연결되는 수단이 되었다. 깨진 거울은 그 수단마저 부정했다. 광증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기에, 거울이 깨져도 내게 문제 되는 건 없다.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마치 저번에 거울을 놓고 왔을 때 한참을 불안에 떨던 것처럼, 또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그 이유는 안다. 아마 나에게 비롯되는 모든 건의 원인은 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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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며칠이 지난지 모른다. 더 이상 거울 보기를 포기했다. 그 안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게 없다.
저번에는 엄마가 찾아온 것 같았지만 문을 열어줄 순 없었다. 엄마가 어떻게 보일지 모른다. 단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집 비밀번호를 모르는 엄만 자식도 못 보고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고구마에 연락이 왔다. 다행히 내가 고구마로 전화를 거는 건 못해도, 고구마가 떨리는 진동으로 전화가 온 건 알 수 있다. 엄마한테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출장을 가 집에 없다고 말이다. 또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지금 동화 속 나라로 떠난 거다. 엄마도 못 알아보는 불효자식이 아니라, 단지 다른 세계에 있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언제쯤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올지, 그때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잠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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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조. 치킨. 콘센트. 나무토막. 미역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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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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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처럼 다시 죽을까 고민했지만, 죽음은 너와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에,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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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창문 사이로 달빛을 내리쬔다. 아주 커다란 보름달이었다. 물론 저 보름달이 진짜 보름달일지, 아니면 태양일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보름달이었다. 그날도 달이 이렇게 비췄는데.
나는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불의 촉감이 이불인지, 젖은 종이인지, 잘 모르겠다. 눈만 깜박이고 있으면, 침대가 어느 순간 바닥이 되고, 바닥이 어느 순간 물이 되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은.. 빛이 너무 똑바르다. 달빛이 아니라, 누가 일부러 내 방을 들여다보는 빛 같다. 이것마저 망상인 걸까.
몸을 일으킨다. 목이 뻣뻣하다. 몇 번이나 잠들었고, 몇 번이나 깼는지 모르겠다. 깬다고 해서 현실이 오는 것도 아니고, 잔다고 해서 악몽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잠깐의 어둠 속에서는 네가 떠오른다. 네가 있다는 확신 같은 게 생긴다. 그게 너무 얄밉다.
“보름달…”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나도 내가 아닌 날이 너무 많아서,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고구마가 덜덜 떤다. 또 연락인가. 엄마일까. 동생일까. 아니면 회사일까. 이제는 고구마가 떨리는 진동만으로도 전화가 왔다는 걸 안다. 손을 뻗었다가 멈춘다.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받는 순간,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 다른 걸로 보일까 봐 무섭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고구마가 그냥 고구마였으면 좋겠다. 고구마가 고구마인 날은 차라리 덜 잔인하니까.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안 본 지는.. 며칠이었더라. 어차피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없었다. 그러니까 거울은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발이 저절로 이쪽으로 왔다. 달빛이 너무 커서 그런가. 보름달이면, 네가 온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약속했었으니까.
거울을 본다. 나만 보인다.
한참을 본다. 여전히 나만 보인다.
다시 거울을 본다. 그럼에도 너를 볼 수 없다.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었겠지. 거울은 거짓말을 못 한다며. 그러면 이게 진짜 나라는 소리인가? 이런 얼굴, 이런 눈, 이런 표정이 나라는 소리인가? 나는 이렇게 생겼던 적이 없다. 아니, 이렇게 생긴 적이 있었나. 있겠지. 거울이 보여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울은 나를 보여주면서도 나를 지워버린다.
“너 어디 갔어…”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말이 벽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게,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다. 그게 제일 무섭다.
달빛이 더 밝아진다. 아니, 더 가까워진다. 창문이 창문이 아닌 것처럼, 달이 내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달빛이 내 손등에 닿는다. 따뜻하다. 보름달인데 따뜻하다.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때였다.
거울 표면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혹시… 혹시.
“너야?”
대답이 없다.
나는 거울에 이마가 닿을 듯 더 가까이 다가간다. 손을 들어 거울을 만지려다가, 손끝이 떨려서 멈춘다. 닿는 순간 네가 사라질까 봐, 아니면 내가 사라질까 봐. 요즘은 둘 중 뭐가 더 무서운지도 모르겠다.
거울 속이 다시 흔들린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사진이 현상되는 것처럼 그 안에 네 윤곽이 뜬다. 처음에는 흐리다. 흐린 얼굴. 흐린 눈. 흐린 입술. 그럼에도 이상하게 선명하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선명했다.
- 이렇게 살면 삶이 아깝지 않니?
너였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무릎이 꺾인다. 손바닥으로 거울 아래 프레임을 붙잡고 겨우 버틴다. 네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아니, 믿기지 않는데도 너무 익숙해서.
“왜… 이제야 와.”
- 내가 안 온 게 아니야.
“그럼 왜 안 보였는데.”
- 네가 나를 안 봤잖아.
너는 마치 책임이 전부 내 쪽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게 화가 나야 함에도 내 마음에는 화가 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네가 너무 오래 없었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아팠다.
“그동안 날 지켜봤니? 내가 어떻게 됐는지.”
- 봤지.
“그런데도… 왜 안 나왔어.”
- 너는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더라.
그 말이 목을 친다. 반박해야 함에도 반박할 문장이 없다. 필요할 때만 찾았다고? 나는 매일 너를 생각했는데. 매일 네가 보고 싶었는데. 매일 네 이름을 부르지 못해서 입안에서만 굴렸는데. 그런데도 네가 이렇게 말하면, 그게 사실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엄마에게도 그랬고,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필요한 순간에만 진심을 꺼내고, 그 외에는 거짓으로 버텼다. 나보다도 네가 나를 제일 잘 안다. 마치 나처럼.
“미안해.”
- 왜 그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네 목소리가 차갑다. 아니지, 차가운 게 아니라.. 정확하달까. 정확해서 아프다. 거울은 거짓말을 못 한다며. 그러면 네 말도 거짓말이 아니겠지. 그래서 더 아프다.
“나.. 진짜로 망가졌어.”
- 알아.
“거울을 봐도 낫지 않아.”
- 안다니까.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해.”
구걸처럼 너에게 답을 묻는다. 나는 이제 내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그렇게 인정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편해진다. 그 편함이 더 끔찍하다. 의존은 늘 이렇게 시작되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버리니까. 그럼에도 나는…
너는 한참을 말이 없다. 거울 속의 너는 나를 가만히 본다. 달빛이 네 얼굴 위로 지나가며 네 윤곽을 잠깐 또렷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반가움. 안도. 그리고, 두려움.
“너… 왜 그렇게 봐.”
- 너도 이제 느끼지?
“뭘.”
- 내가 없는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는 거.
나는 숨을 삼킨다. 그 문장이다. 내가 예전에, 네가 있었을 때,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 네가 그걸 그대로 꺼냈다. 마치 내 마음을 훔쳐 읽은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동시에… 그게 너무 달콤하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히 말해준 적이 있었나. 엄마도, 연인도, 회사도, 아무도 내 마음을 이렇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너는.. 다시 온 거야?”
- 응.
“나를 살리려고?”
- 그것도 맞고.
“그것도…?”
너는 아주 천천히 웃는다. 웃는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애매함이 나를 더 끌어당긴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야 하는데, 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너는 낮게 말한다. 달빛이 너의 목소리를 밀어내듯 방 안을 가득 채운다.
-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