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그곳에서

4막. 그믐


내가 없는 그곳에서
성숙해진 네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내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새삼스레 쓰다듬어 본다


우리가 일주년일 때,
서로의 궁핍한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종로에서 겨우 맞춘 금덩이 반지.
나는 그 반지를 아직까지 빼지도 못하고

그저 내 손가락에 걸쳐놓았는데
너는 그 빈자리에 내가 보지 못했던
너의 성숙함을 얹어놓았구나


내가 걷는 모든 길이 너와의 추억으로 점철돼 있는데
내가 없는 그곳에서 분명 너도 아파했을 텐데
너는 하염없이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이제 네 옆자리가 내 자리가 아님에 나는 처절히 아파하지만
나보다 어린 너임에도 너는 벌써 상처를 털어내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렸네

내가 보지 못한 그 모습을
이제는 내가 네 옆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파하는 건
너무나도 어린 선택이겠지


가던 널 마냥 보내버린, 내 어린 날의 치기여
가버린 너에게 연락 하나 하지 못한, 내 어린 날의 어리석음이여
너는 여전할 것이라고 속단한, 내 어린 날의 방종이여
나의 어림이 너를 어른으로 키워버렸다는 것에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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