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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읽은철학 Mar 17. 2022

우리 진짜 친구 맞지?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장례식에서  위해 진심으로 울어  친구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다


나는  말을 들으면 인간관계에 미숙했던 사춘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느 사춘기가 그러하듯, 나의 사춘기도 또래집단 속에서 맺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많은 좌절을 겪으며 지나갔다. 특히 나만의 잣대로 친구관계를 재단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의 괴로움 속을 허우적거리던 순간이 많았던  같다. 오늘은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때 날 괴롭혔던 많은 감정들의 원인은 '베프/친한친구/친구'라는 구분에서 출발한다. 그때의 나에게 베스트 프렌드라 함은 내가 너를 그렇게 여기듯이, 반드시 너도 나를 그렇게 여겨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누군가 "야, 너랑 제일 친한 애가 누구냐?"라 물으면, 서로가 서로를 지목해야만 그 둘이 비로소 '제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제일'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서로가 서로 외에 다른 사람이 존재해서는 안 됐다. 누가 보아도 서로에게 서로가 오직, 제일로 친한 친구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또 비슷한 이유로 ‘내가 이만큼이나 해주는데, 나한텐 왜 그 정도를 못해주나’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겼다 하면, 우리 사이가 '남'들이 보아도 ‘제일 친한’ 친구여야 하는 만큼 나는 너에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이것과 저것들은 모두 다시 돌아와야 마땅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러한 등가교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째서 너는 나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는 것인지 속으로 친구를 원망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진짜로 미워하게 되면 그 친구마저 잃게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저 매 순간을 전전긍긍하며 견딜 뿐이었다.


말만 들어도 피곤해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구분이 정말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래서, 아니 당연히, 친구관계 때문에 속앓이 하는 시간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주위에 친구들은 와글와글 함께 있었지만, 저 혼자서 군중 속의 외톨이에 몰입하고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다며 우울해했다. 조금 친해지면 그 친해진 친구에게 나 말고 나보다 더 친한 친구가 있을까 걱정하고 질투했다. 그게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꾼 게 언제쯤일까.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와 진짜 외톨이가 되면서부터인 듯하다. 방 한 칸에 혼자 누워있던 어느 날 문득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도, 선생님도, 가족도, 연인도. 인간관계 자체가 모두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참 극단적이다. 학교를 그만둔 게 17살이니까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긴 했나 보다. 아무튼 얘도 쟤도 다 소용없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일들이 모두 의미 없는 헛짓거리 같았다. 당시에는 살짝 악에 받혀 내가 이렇게 잘해줘 봐야 얘는 그런 나를 몰라주는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아마 내가 노력해야 유지되는 관계들에 진절머리 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때 찾은 해결방안이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였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모조리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필요하면 찾겠지 싶어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일 친한 친구가 없어서 힘들 거라면, 차라리 아무도 옆에 두지 않음으로써 이 힘듦을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그것도 어렵더라.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모든 관계를 끊었더니 사무치게 외로워져 다시 슬퍼졌다. 결국 난 얼마 안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게 됐다. 상대방의 삶에 내가 어느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남들 눈에 보이는 나와 이 친구의 모습은 어떤지. 다시 그것들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또다시 스스로가 만든 틀에 갇혀 슬퍼했다. 나는 왜 힘들까, 나는 왜 슬플까 한참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은 그 당시의 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이런 괴랄한 태도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식 관계나 ‘준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다 보면, 나의 진정한 감정에는 소홀해진다. 나는 그동안 집착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다. 그를 위해서 기꺼이 나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의 터전으로 한 걸음 들어갈 줄 아는 것이다. 완벽할 순 없더라도 그의 시선에서 생각해보고 발맞추어 가는 것이다. 이건 연인 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사이, 가족 사이,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집착은 그렇지 않다. 집착은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의 잣대를 내려놓는다기보다는, 나의 시선을 고집하며 그를 나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집착의 실상은 나르시시즘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집착이 마치 사랑인 것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집착은 결코 상대를 향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지독하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집착의 대상이 역으로 나 자신을 향하게 되고, 스스로를 옭아매게 된다. 내 힘듦의 근본적인 이유는 나를 향한 지독한 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이기심에 있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향유’와 ‘사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향유는 그 자체만으로, 그것만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사용한다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을 도구처럼 이용한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사용이 아닌 향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사용하는 유용한 도구처럼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러한 믿음 안에서 만족을 느끼고 안락함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심이 비단 하나님을 향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이 아닌, 나의 곁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날 최고로 여긴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날 좋아해 줄 필요는 없다. 당연히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내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친한 친구'라는 기준도 무의미하다. 각각의 관계들에 굳이 서열을 매기고 재단할 필요가 없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감정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 무엇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나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면 된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그러면 관계의 외양은 딱히 중요해지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위해서 나의 마음이나 상대의 마음을 도구로 사용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이만큼이나 해줬으면 이 정도는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닦달할 필요도 없다.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마주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감정에 푹 빠져서,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싶은 만큼. 상대가 나를 속인다면 기꺼이 속아 줄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전달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고 나서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만족과 평온을 누리면 그만이다. 나를 갉아먹을 필요도, 남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다.


물론 어느 순간 나의 감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가 나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에도, 언젠가 그와의 관계에 최선을 다 해 행복했음을 추억의 한 켠으로 남겨 둔 채, 새롭게 마주하고 있는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어차피 영원한 건 없고, 만약 그러한 게 있다면 그건 오직 그 사람과의 추억일 것이다. 차라리 좋은 기억들을 남기자. 먼 훗날 이 기억을 떠올렸을 때 후회스럽지 않도록 하자. 연인관계든 친구관계든, 이 사람들과 무한한 시간 동안 영원한 사이로 남을 수 없음을 항상 생각하고,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온 마음을 다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뿐이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어떤 존재를 향유(享有, frui)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만을 위하며, 그 존재 안에서 만족하며 쉬는 것이다. 반면 사용(使用, uti)하는 것은 욕망의 정당한 대상일 경우,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부당한 대상일 경우, 오히려 남용이라고 우리는 불러야 한다. ―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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