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감, 지실마을을 지나다 계당(溪堂) 한 곳 백매(白梅)를 보며 잠시 쉬었다지. 낯선 이를 보자 화들짝 놀라 활짝 벌어진 매화 사이로 하얀 무명저고리 입은 봉용(丰容)의 처자를 보고는 영감 또한 놀라 아들 색시 삼겠다고 마음먹었대. 그 처자는 정씨로 무학이었다고. 마음먹은 대로 대사(大事)를 치른 뒤, 그 처녀 지실댁이 되었는데 반지는 없었고 비녀랑 옷고름은 있었대. 새신랑이 좀 나이 들어 보여 썩 마음에 차진 않았어도, 인상 좋고 글솜씨도 있어 잘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대.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집. 밤낮으로 살림을 일구고 육 남매를 낳았는데 그 애들, 넘어졌다 일어서기도 하면서 쑥쑥 잘 크더래. 낮이면 밭에 나가 얼굴 가맣게 타도록 또 등이 굽도록 일을 했고, 저녁이 오면 없는 찬이지만 따뜻한 밥상을 차렸더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틈틈이 글을 배웠고, 새끼들이 많아 늘 부족했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대.
바람이 맨 먼저 드나드는 외딴집이라 세월도 이들에게는 한발 먼저 왔다 가더래. 부인은 가끔 혼자서도 우렁이 같은 전화를 새끼들에게 하곤 하였고, 며느리가 우렁이 같은 배를 한 지 아홉 달쯤 되던 어느 날, 부군은 부인을 남겨둔 채 마중 나온 영감을 따라 파랑 파랑 파랑새가 되어 떠났대. 이 미부(美婦)의 얘기는, 부군이 처가를 다녀오다 담양 죽물전에서 사다 준 참빗과 함께 지실에서 백 리쯤 떨어진 한 마을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