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약금이라는 관행
모든 사회에는 관행이란 것이 있다. 관행이란 말 그대로 관습적인 행동을 뜻한다. 오래전에 해오던 행동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관행은 과거부터 해오던 것일 뿐 옳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래전부터 해왔다거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관행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업계 종사자가 아닌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업계 사람들이 관행이라고 하면 이를 거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원래 다 이렇게 해요.”, “다른 곳에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라고 대응하면 웬만한 꼴통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이외에는 관행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계약에 있어 대표적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관행이라고 하면 바로 가계약금을 들 수 있다. 부동산을 매수하거나 임차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색하고 있는 지역 인근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는다.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물건들을 물어보고 실제 부동산을 눈으로 확인하면 중개인 측에서는 “ 지금 매물이 인기가 많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일단 가계약금부터 거세요.”라고 재촉한다. 매수인이나 임차인 입장에서는 맘에 드는 물건이 있는데 곧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하니 급한 마음에 일단 매도인이나 임대인의 계좌로 일정 금액을 가계약금 명목으로 보낸다. 일단 가계약금을 보낸 매수인이나 임차인은 물건의 우선권을 확보했으니 매도인이나 임대인이 다른 사람에게 매물을 팔 수 없다고 안심한다. 집에 돌아가 드디어 살 집을 구했다며 한시름 놓고 축하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과연 매수인이나 임차인의 기대가 법적으로 타당한 것일까?
재수없으면 내가 당사자가 되는 가계약금 문제
가계약금 지급 후 매도인과 매수인 또는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원만하게 계약서가 작성되고 잔금이 오고 가 계약이 마무리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대부분의 가계약금이 지급된 계약은 잡음 없이 계약이 종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100건 중 1~2건에서 터진다. 일반적인 가계약금 문제 발생은 부동산 시세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부동산 시세가 급격하게 올라가면 매도인이나 임대인은 매매가나 보증금을 올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매도인이나 임대인은 아직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가계약금만 돌려주면 아무 문제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매수인이나 임차인은 가계약금을 보냈으니 매도인이나 임대인이 임의로 계약내용을 변경하거나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고 항의한다.
위 상황과는 반대로 매수인이나 임차인이 계약 파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가계약금은 계약서 작성 이전에 오고 가는 돈이다 보니 실제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야 비로소 매매 부동산의 구체적인 상태나 하자, 매매대금 지급시기, 인도시기 등의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매수인이나 임차인은 계약서 작성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때 매수인이나 임차인은 계약서 작성 없이 가계약금만 반환받기를 원한다. 매도인이나 임대인은 가계약금이 지급되었으므로 임차인 마음대로 계약서를 쓰지 않을 수 없고 가계약금을 몰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원까지 가는 가계약금 분쟁
현실에서 실제 가계약금 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은 쉽지 않다. 계약 일방은 가계약금을 몰수하려 하고 다른 일방은 가계약금을 반환받기를 원한다. 그 중간에서 공인중개사는 계약 성립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중개수수료의 지급을 원한다. 계약 관계인들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에서 원만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립이 이어져 법원의 재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법원의 재판까지 가는 경우 계약 당사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을 고민한다. 실제 가계약금은 많아야 1,000만 원 이하 수준이다. 몇 백 만원의 문제로 고액의 변호사 선임비를 들이는 것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부분의 가계약금 분쟁은 변호사 선임 없이 당사자 소송으로 진행 된다. 그런데 금액이 작은 소액소송이라고 하여 항상 간단하고 쉬운 것은 아니다. 일반인이 처음해보는 재판 출석이며 서면제출에 치이다 보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결국 가계약금 분쟁으로 계약 당사자들은 심한 내상을 입는다.
가계약금의 법적 실체
가계약금 문제를 법률적으로 풀어보자. 가계약금이라는 용어는 어느 법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민법 565조에서는 계약금에 대해서만 정하고 있으며 매매계약 당시 당사자 일방이 계약금을 교부하면 이를 해약금으로 본다. 계약 당사자 일방은 계약금을 포기하거나 배액 배상하는 것으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있다. 즉 계약의 일방적인 해제는 법률상 계약금과 관련된 문제이며 가계약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계약금도 계약금의 일부이므로 계약금 일부가 지급된 것으로 보아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우 계약금 일부를 지급한 것으로 보기 위해서는 당사자 사이에 계약 성립에 대한 본질적 사항이나 중요사항에 관하여 구체적인 합의가 존재해야 한다. 대법원은 매매계약의 구체적인 합의가 존재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기준으로 매매목적물과 매매대금 등이 특정되고 중도금 지급방법에 관한 합의가 존재하였는지 여부를 들고 있다.
만약 가계약금 교부 이전에 구두나 문자 상으로 매매목적물과 매매대금 등이 특정되고 중도금, 잔금 지급방법, 인도시기 등이 정해졌다면 계약서 작성 이전이라도 매매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매매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본다면 계약 일방 당사자가 계약을 해제하기 위해 가계약금 배액상환이나 가계약금 포기로는 부족하고 계약금 전체의 상환이나 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계약금은 계약금 및 해약금의 일부라고 보아야 하므로 가계약금 포기나 배액상환만으로는 계약 해제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계약금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규율하고 있는 구체적인 법규정이 없기 때문에 가계약금과 관련된 법원의 판례는 판사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계약금과 관련된 명시적인 대법원 판례가 존재한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아질텐데 가계약금이 소액이다 보니 가계약금 분쟁과 관련하여 대법원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때문에 가계약금에 대한 구체적인 법리를 제시한 판례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 나온 하급심 판레 중에서는 매수인이 가계약금을 지급하고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 매도인을 상대로 가계약금 반환을 구한 사안에서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가계약금은 반환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안이 있다. 반면에 가계약금은 매수인에게 다른 사람에 우선하여 본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우선적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본계약의 체결을 거절하는 매수인은 가계약금의 반환 역시 포기해야 한다고 본 사안도 있다.
하급심 판례 역시 재판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고 있으니 현재로서는 가계약금이 계약금과 마찬가지로 해약금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법적으로 그 효력이 불분명한 가계약금의 교부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가계약금 분쟁도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계약서를 쓰고 돈을 주고받는 것이 정석
가계약금을 교부하고 문제가 발생할 바에야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까지는 애초에 가계약금을 주고받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물론 매매계약이 한시라도 시급한 상황이고 중개인이 가계약금 지급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까지 가계약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 가계약금 교부가 지니는 위험성과 모호성을 고려해보자.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충분한 계약 내용을 검토한 후에 계약금을 교부하는 것이 매매계약이나 임대차계약에서의 정석이다.
문제 해결의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정석대로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