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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Sep 25. 2023

나의 이야기

이곳에도 이런 낭만이....


며칠 전 오후 5시쯤 되었을 무렵, 학교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딸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이른 저녁메뉴로 김치볶음밥을 요청했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도마 위에 한쪽을 올린 후 잘게 썰고 있었다. 순간 나의 왼쪽 얼굴로 붉은빛이 비치어 들었다. 이게 뭔가 싶어 나의 시선을 왼편으로 돌리니 거실 창가의 통창 샤시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른손에 든 칼을 도마 위에 두고 왼손에 낀 일회용 비닐장갑을 벗고 나는 창가로 다가섰다. 이중창인 시를 두 개다 열고는 대로변 건너편에 있는 높은 건물 사이로 보이는 노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저 붉은색만 있는 것이 아닌 노을은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할 지경이었다. 노랑, 주황, 베이지, 빨강, 자줏빛까지 총 천연색이 어우러져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보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었다. 보고 있으니 빨려들 것 같은 노을을 놓칠세라 눈에 담은 나는 이내 휴대폰을 찾는다. 노을이 지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순간의 찰나로 지나가버리니까. 노을 또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휴대폰 카메라로 여러 장을 찍은 후에도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감동스러운 노을의 빛깔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김치볶음밥을 해서 딸아이와 먹으며 다시 샤시쪽을 바라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을은 온대 간대 없고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오피스텔이다.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이사 갈 집의 인테리어를 두 달 동안이나 하게 되어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고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지금껏 살던 곳은 아파트 로비 층으로 나가면 딸아이 학교 정문이 코앞에 있고 학원들도 차로 기껏해야 5분 내외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지금의 오피스텔로 오니 모든 것이 불편했다. 딸아이의 등. 하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학원을 다니는 것도 내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위치가 살짝 어중간했다. 버스를 타기엔 너무 둘러야 하고 걷기엔 꽤 먼감이 있었다. 살던 집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살 수가 없으니 그냥 최소한의 살림만을 가지고 왔다. 그릇도 최소로, 옷가지도 최소로.. 그러다 보니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며칠 전의 노을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서 멀리 가지 않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었구나.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면 늘 어딘가 먼 곳으로 가야만 여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잠시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면 좀 좁은 곳에서 단순하게 반복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딸아이의 학교와 학원을 좀 둘러가야 하는 것도 모두 여유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불편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툴툴거리기보다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알던 이곳은 그저 10차선 대로가 늘어져있고 그 도로 위로는 아침저녁으로 늘 차들로 붐비는 곳으로만 생각했었다.  이곳이 노을 맛집이었다는 것을 살아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녁밥을 하는 나의 얼굴로 노을이 떨어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니 겪어보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다는 걸 또 한 번 알아간다. 10차선 도로 위로 솟아있는 오피스텔에도 이런 낭만이 있다니...


내가 묵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나가 바로 옆건물 상가 1층에 커피 맛집도 있다. 10일에 한 번꼴로 원두를 사다가 갈아 커피를 내리는 것도 이곳에서의 새롭지만 힐링되는 나의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커피를 갈면서부터 향긋하면서도 묵직하고 고소한 커피 향이 집안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 그렇게 내린 커피는 하루를 차분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활력제가 되어 주고 있다.


결국 내가 어디에 있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나의 편의만 생각하면 불편한 점 때문에 마음이 괴롭겠지만, 어디에 있든 지금 내가 잠시 머무르는 이곳이 여행 온 것이라 여기면 모든 것에 의미를 둘 수 있게 된다. 두 달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라 할 수 있지만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이제 한 달이 남았다. 여행지에 가면 일상에서 늘 보던 것들도 나의 모든 감각이 열러 새롭게 느껴지듯이 이곳에서의 생활도 나의 집으로 돌아가면 새삼 그리울 거란 걸 안다.


노을 맛집인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이 다른 노을을 보게 된다면 주저 없이 눈과 휴대폰에 담아 집에 가서는 마음이 헛헛한 날에 한 번씩 꺼내어 봐야지.. 그러면서 추억해야지..


그래.. 거기가 노을 뷰 하나는 끝내줬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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