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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두나무 Aug 17. 2023

나의 이야기

영원한 건 없다


"요놈들이 또 테레비 본다고 밥을 더디게 먹네. 안 되겠다. 테레비 꺼라!"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주말이면 외갓집에 자주 갔었다. 엄마가 5남매 중 맏이고 나도 맏이라 외갓집에 가면 모두 동생들이었다. 외갓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아이들은 따로 밥상을 차려 우리끼리 밥을 먹곤 했었는데 밥상 바로 앞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티비 보는 것을 즐기는 나이였지만 무섭기가 호랑이 같은 외할아버지는 봐주는 법이 없으셨다. 누군가가 밥숟가락 들고 입을 반쯤 벌린 채로 하염없이 티비를 보고 있을 때면 말없이 리모컨으로 티비를 꺼버리셨던 분이셨다. 나를 포함한 동생들은 모두 군말 없이 서둘러 밥을 먹기 바빴고 외할아버지랑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다들 외할아버지를 은근히 무서워했다.


커다란 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자그마한 정원이 있던 외갓집. 외갓집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던 안방으로 들어가면 할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할아버지가 머리카락에 바르는 기름 냄새였다. 키가 180센티가 넘으시고 체격도 제법 좋으셨던 외할아버지는 항상 머리에 기름(요즘 같으면 헤어젤이나 무스 같은 것)을 바르시고 아주 가늘고 촘촘한 일자빗으로 올백하듯 머리를 넘겨 반듯하게 빗고 다니셨다. 잘 빗어진 머리 위로는 짙은 회색과 진갈색 같은 어두운 색의 중절모나 헌팅캡(앞쪽은 똑딱이 같은 것으로 붙어있고 뒤로 갈수록 둥근 모양을 한 모자)을 항상 쓰고 다니셨다.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실의 장 위에 모자가 놓여 있으면 할아버지가 계신 거고 모자가 없으면 아직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거였다.  옷은 항상 잘 다려진 셔츠에 넥타이를 매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정장 바지를 입고 다니셨다. 어릴 때부터 매번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할아버지만 봐와서 그런 걸까 아님 늘 꼿꼿한 자세에 잘생긴 얼굴의 할아버지가 쓰셔서 그런 걸까 나이가 든 남자 어른이 모자를 쓴 모습은 멋지고 기품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길을 가다가 나의 외할아버지처럼 중절모나 헌팅캡을 쓴 다른 할아버지를 보면 그렇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그저 반쯤 벗겨진 두피를 가리는 정도로만 쓰고 다니시는 분이 대부분이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목소리톤도 중저음으로 낮았고 말씀을 하실 때면 빠르게 하는 법이 없으셨다. 좀 느리다 싶을 정도의 속도로 말수도 많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의 말투, 행동, 외형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이 할아버지 자체였는데 그런 것들이 멋있다고 느껴지면서 동시에 엄하고 무서워 아주 가깝고 친근해서 포근한 느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설(구정)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외갓집에 시집. 장가간 엄마의 남매들이 모두 모였다. 다 같이 식사를 한 후에는 어김없이 초록색 담요가 깔리고 화투판이 벌어졌다. 어린 나의 눈에도 엄마는 아버지인 외할아버지를 약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와 화투를 칠 때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하고 즐거워 보였다. 할아버지도 그때만큼은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지랄한다. 저거는 밥 먹고 화투만 쳤나. 와저래 잘치노" 그러면 엄마, 큰 이모, 막내 이모, 며느리(외숙모)는 깔깔깔 소리를 내며 좋아하셨다.  큰 이모는 항상 "나는 아부지한테 욕먹는 재미로 사는데 요새 아부지 욕을 못 들었더니 별로 재미가 없던데.. 오늘같이 욕먹으니까 이제 살 거 같네." "아주 지랄도 가지가지한다. 저거는 우찌 된 게 욕을 못 들어먹어서 난리고." "아이고~~ 힘난다!!! 나는 아부지 욕이 젤 좋더라." "지랄한다. 저거는 내 놀리는 재미로 살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할아버지와 딸들. 며느리와의 화투판은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닌 그저 할아버지의 욕을 듣고 즐거워하는 게임판 같은 것이었다. 어렸던 나의 시선에 '지랄한다'는 표현은 욕 같은 말이었지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도 그 말을 듣는 엄마와 이모들도 모두 즐거워하는 걸보며 아.. 저 표현이 할아버지의 애정 표현이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해서 무서웠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외갓집의 안방으로 들어가면 항상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는 두툼하고 기다란 요(요즘의 토퍼 같은 것) 위에 앉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별말씀은 없이 티비를 보셨는데 전국노래자랑 아니면 국악한마당 같은 거였다. 어린 나이의 나에게 그런 것들이 재미가 있을 리 없지만 나는 할아버지 옆에 붙어 앉아 말없이 그저 같이 보곤 했다. 할아버지는 이게 왜 재미있다고 느끼시는 걸까.. 좀 지루하다 생각하면서...


내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를 갔다 온 어느 날. 엄마로부터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갑자기? 왜? 엄마가 병원에 가는데 혹시 같이 갈 거냐는 물음에 단번에 함께 갈 거라고 대답했다. 여러 명이 함께 있는 병실에 엄마가 먼저 들어가고 내가 뒤따라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안쪽에서 두 번째 침대에 누워계셨는데 나는 할아버지 침대까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눈앞에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나는 그쪽으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순식간에 내 눈에 눈물이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양손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고서는 할아버지가 눈에 보였다. 상체를 살짝 일으키신 채로 나를 향해 웃으며 손짓을 하신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알던 그 할아버지가 아니셨다. 머리카락은 새집을 지은 듯 하늘 위로 솟아 삐뚤빼뚤하니 헝클어져 있었고 매번 꼿꼿했던 허리가 볼품없이 침대에 의지해 기대어 있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도 없고 왜 이렇게 되신 건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건 차오르는 슬픔과 알 수 없는 서글픔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불러서는 침대 옆에 앉히시고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아이고. 야가 와이래 우노. 누가 보면 할부지 죽은 줄 알겠다. 할부지 안 죽는다. 괜찮다. 영아. 허허허허 허허"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하나도 없었고 말씀도 겨우 하시는 거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옆에 몇 분을 앉아있었을까.... 할아버지 진짜 괜찮으시냐는 말도 어디가 안 좋으시냐는 말도 하지 못했다. 단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바보같이 할아버지께 아무 말도 못 하고 편찮으신 분 앞에서 눈물만 흘리다 나온 걸까..


며칠 뒤 할아버지는 퇴원해서 외갓집으로 돌아오셨고 한 달쯤 후에 집에서 심정지로 돌아가셨다. 내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건 그때 병원에서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평상시의 할아버지는 내게 커다란 바위산 같은 분이셨다. 크고 단단해서 움직임은 적고 뭔가 포근한 느낌은 덜했지만 언제든 가면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 겉이 단단해서 다가가긴 어려웠지만 내가 아는 가장 멋지고 큰 어른 같은 분. 항상 안방의 옆자리를 내게 내어주신 분. 나의 외할아버지....


그때의 나는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외할아버지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오래오래 사실 거라 여겼었나 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살아있을 때 아무리 강하고 건강한 듯 보여도 죽으면 끝이구나. 그건 누구도 막을 수가 없구나. 동시에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눈물 대신 좀 더 많은 말을 할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얼마 전 티비에서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니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중절모를 사드렸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역시나 우리 할아버지만큼 멋지게 중절모가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는 나 혼자만의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렸을 때나 중년이 된 지금이나 나에게 세상 제일 멋진 할아버지는 오직 외할아버지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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