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튜 베리/시공주니어
품위의 극치, 피터 팬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8쪽/민음사)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의 변화를 세 단계로 이야기한다.
첫 단계인 낙타는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고 인내하며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태도이다. 낙타가 사자 단계로 넘어가면 강력하고 적극적인 자주성으로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한다. 마지막 단계로 어린아이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다. 선악의 경계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는 아이에게 삶은 창조적 놀이의 과정이다. 낙타와 사자와 아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참된 자아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아이란 얼마나 매혹적인 존재인가.
<피터 팬>은 가치의 창조자이자 초월자로서의 어린이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는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피터가 있는데, 책을 읽고 나면 이 인물이 생각보다 입체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피터는 용감하고 정의롭지만, 제멋대로면서 잘난 체하고 자기중심적이다. 한없이 순수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심 없는 악당으로 돌변한다. 대개의 어린이들이 그렇듯.
이런 피터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매 순간을 놀이로 받아들일 때이다. 피터는 후크와의 대결이 기쁨이고 하릴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신선한 놀이이며 죽음조차 신나는 모험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입만 열면 대단한 아포리즘이 쏟아진다. 재미있는 건 이게 아무렇게나 대충 내뱉는 말이라는 것이다. “넌 누구냐?”라는 질문에 “나는 젊음이요, 기쁨이다. 나는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다.”라는 대답을 하는데, 후크는 피터의 그런 태도야말로 ‘품위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후크는 피터를 사랑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후크가 피터를 미워했던 이유는 피터가 후크의 팔을 잘라 악어에게 던졌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팔과 함께 벽시계를 삼킨 악어가 후크를 계속 따라다녀 시계소리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후크의 푸념은 피터를 미워하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겠다. 후크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피터의 창조성을 부러워했다. 언젠가 후크에게도 분명히 존재했을 영웅적 면모를 피터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시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후크가 선택한 건 인정하고 배우는 게 아니라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물론 피터는 그러거나 말거나 뽀얀 젖니를 드러내 보이며 끊임없이 도발한다.
피터에게는 엄마도 후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는 나쁜 기억만 떠올리게 하고 엄마들이란 과대평가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피터와 엄마의 전사(前史)가 궁금해진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요정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을까, 시계를 삼킨 악어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도망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사람이었을까. 분명한 건, 정신없이 놀던 피터가 언제고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고 기다려 주는 엄마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 떨어져 나간 그림자를 꿰매 주고 잠들기 전에 이야기도 들려주는 엄마, 긴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환하게 웃어 주는 엄마 말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두 번째, 다음 아침이 올 때까지 똑바로 가면 나오는 네버랜드를 지켜주는 사람이라면 피터의 엄마로서 자격이 될까?
어쨌거나, 한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날개가 그리운,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