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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원형의 책 22화

파랑이와 노랑이

레오 리오니/파랑새

by 고양이스웨터

심심하면 나랑 놀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거리 기차 여행은 고난의 길이다. 비협조적인 엄마나 아빠를 졸라 할 수 있는 온갖 게임을 다 해도, 도시락을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바깥은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뿐이다. 아이는 심심하다. 심심한 건 슬프다. 이럴 때 할 일은 울며 떼쓰기. “으앙, 심심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잡지책을 찢어가며 이야기를 지어 들려준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레오 리오니의《파랑이와 노랑이》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손자를 달래고 싶은 할아버지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파란색 종이를 동그랗게 찢어 “얘가 파랑이란다.”하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손자는 울음을 그치고 주름진 할아버지의 손을 응시한다. 할아버지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러는 동안 파랑이와 노랑이의 세계에 진입한다.


파랑이는 엄마가 집에 있으라 했지만 앞집 노랑이랑 놀려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노랑이네 집이 비어있다. 파랑이는 노랑이를 찾아 돌아다니다 길모퉁이에서 노랑이를 만난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너무 반가워 꼭꼭 껴안는다. 파랑이랑 노랑이가 초록이가 될 때까지.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오는데, 파랑이 엄마 아빠는 파랑이를 못 알아보고 초록이라고 한다. 노랑이 엄마 아빠도 노랑이를 못 알아보고 초록이라고 한다. 파랑이와 노랑이는 파란 눈물, 노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울고 또 운다. 초록이가 된 파랑이와 노랑이는 다시 파랑이와 노랑이가 될 수 있을까?


이 책의 그림은 손으로 정성스레 찢은 색종이로만 표현되어있다. 동그란 색종이 조각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인물의 심리가 그대로 전달되는데, 그 표현 방식에 유머가 가득하다. 빨강, 주황 친구들과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파랑이는 헤헤 웃을 것 같고, 엄마 말 안 듣고 튕겨나가는 파랑이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을 것이고, 놀다 지쳐 집에 돌아오는 파랑이는 배가 고프겠고, 뽀뽀하는 파랑이는 행복하다. 하얗거나 까만 바탕 귀퉁이에서 기웃거리는 파랑이는 좀 심심해 보인다.


심심한 파랑이는 열 살 이전의 나와 닮았다. 심심할 때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 앞집을 향해 소리치곤 했다.

“영미야, 노올자!”

그럴 때 영미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알았다, 나간다!”

이런 대답이면 기다리거나 영미네 집에 쳐들어가 데리고 나오는 거고,

“안 놀아!”

라고 한다면

“알았다!”

하고 미련 없이 포기하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같이 놀자는 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영미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내 마음이 상할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미는 지금 나랑 못 노는구나, 그러고 끝.


이런 단순함이 사라지고 매사에 행간을 읽는 버릇이 생기면서 친구한테 놀자는 말조차 쉽게 건네지 못하게 됐다는 걸 인지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다소 공격적인 투로 말을 건넸다.

“야, 대학로에 놀러 가자!”

그러더니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덧붙인다.

“짜증 나, 이 말 하나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거냐. 네가 안 간다고 하면 혼자 가면 되는데.”

곧바로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웃음이 터졌다. 너도 나랑 똑같구나. 그냥 놀자고 하면 그만인데 싫다고 할까 봐, 내키지 않는데 따라가는 걸까 봐 걱정이 되어 망설였구나. 그런데, 그런 생각이 한심하다는 걸 알았고 표현했으니 나보다 낫네. 그날 우리는 대학로에서 일치된 의견을 나누는 보람찬 시간을 보냈다. 내용은 대략 이런 거였다. 거절해도 미안해하지 않기, 거절당했다고 상처받지 않기, 함께 하기 싫은 날도 있음을 인정해 주기.


그날 기차 여행에서 가장 심심했던 사람은 어쩌면 레오 리오니였는지도 모르겠다. 창밖에 펼쳐진 들판을 무료하게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멋진 그림책을 만들어냈다. 심심한 할아버지가 그려낸 주인공은 심심할 틈 없이 신나게 노는 어린이였다. 그 어린이는 자꾸만 밖에 나가 놀고 싶게 만든다. 심심하면 나하고 놀자고 말하는 어린이의 제안을 나는 거절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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