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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원형의 책 01화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by 고양이스웨터

서울은 춥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던 젊은 부모님은 막 태어난 아이의 도토리 같은 머리통을 쓰다듬다 문득 다른 세계가 궁금해졌다. 불현듯 찾아온 호기심이 열망으로 이어지던 날, 용기를 내어 서울로 이주를 결심한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시작한 서울살이는 고됐지만 부지런히 일하며 보람차게 살았다. 부모님에게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길러낸 아이는 그보다 배는 넘는다. 무사히 서울 생활에 안착한 우리 집에는 늘 서울로 유학 온 친척오빠들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짧게 한 달, 길게는 십 년이 훌쩍 넘게 맡겨진 소년들 덕분에 우리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그중에서 초, 중, 고, 대학을 지나 직장을 잡고 결혼하기 전까지 같이 살았던 사촌오빠가 있다. 나와 동생은 그 오빠를 그냥 큰오빠라고 불렀다. 친척이 아니라 원래 우리 가족인 것처럼.


늘 책을 끼고 살던 큰오빠에게는 묘한 ‘간지’가 흘렀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개똥철학에 기반한 것이지만, 내가 인지하는 세계 너머를 볼 줄 아는 큰오빠가 꽤나 멋져 보였다. 멋지긴 한데 서로 놀려 먹는 게 일상인 우리 집에서 그런 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그 멋짐을 훼손할 방안을 궁리하며 큰오빠를 도발했지만, 이건 마치 큰 바위를 깨 보겠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했다. 가령, 큰오빠 책장에 꽂혀 있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발견하고 “큰오빠는~연애소설을~읽는대요~ 얼레꼴레리~”하며 놀려대는 일. 사실은 그러는 나야말로 그 책이 몹시 궁금했던 것임을 다들 알고 있었으리라.


오빠는 가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할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모기를 잡으려 애쓰는 나를 보고 대뜸 모기가 불쌍하지 않냐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내가 모기는 해충이므로 잡는 건 정당한 일이라고 대꾸했지만, 모기가 해충이라는 것 또한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했으니 모기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라고 큰오빠는 말했다. 어쩌면 그건 종 차별에 해당할 수 있다고도 했다. 모기를 해충으로 분류하는 일에 모기의 동의라도 얻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큰오빠를 이기고 싶어서 나는 모기를 찾아내 기필코 잡고 말겠다고 결심했지만, 못 잡았던 것 같다. 모기도 못 잡았는데, 더 분한 건 큰오빠의 논리에 은근히 설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후 나는 친구들 앞에서 모기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만다. 마치 온전한 내 생각인 것처럼. 그래서 온전한 사차원으로 찍혀 버렸다. 생각해 보면 대학생이 초등학생을 상대로 실없이 장난친 건데 순진한 어린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 일어난 비극인 것 같다.


큰오빠의 개똥철학이 진정한 빛을 발하는 건 언니와 함께 할 때였다. 큰오빠는 세 살 터울의 언니를 앉혀 두고 쓸 데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이상하게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넌 너무 직선적으로 말하는구나.”

“난 직선이 좋아.“

“세상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원하는 답은 뻔한데,

“직선.”

이라고 일부러 틀린 대답을 하는 언니.

“네가 백 미터 달리기를 한다고 치자. 너는 직선으로 달리는 걸까, 곡선으로 달리는 걸까?“

“직선.”

“너는 똑바로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살짝 구부러지게 달리는 거야.“

“아니, 난 똑바로 달려.”

“우리 몸은 원래 곡선을 지향하지. 우주의 원리가 그런 것처럼.”

“무슨 소리야, 다 직선인데, 수평선, 지평선!”

언니가 드디어 큰오빠의 페이스에 말렸다.

“수평선, 지평선도, 평행선도 다 곡선이야. 계속 가다 보면 다 만나게 돼 있어. 완벽한 직선이란 불가능하단다.”

틀렸는데 맞는 것 같으면서 하찮지만 왠지 심오한 큰오빠의 이야기에는 이상한 낭만이 있었다.


그 이상한 낭만에 쓸쓸함이 더해진 건 길고 길었던 어느 겨울의 일이다. 나는 우연히 큰오빠가 고향에 있는 동생에게 쓰다 만 편지를 보게 된다. 편지는 ‘서울은 춥다.’로 시작하고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것이 영하의 기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그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저 날씨를 말하는 담백하고 고전적인 방식의 첫인사인데 왜 그렇게 느꼈을까.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는 추운 마음을 위로해 줄 한 줄의 시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큰오빠의 겨울이 나보다 더 쓸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는 게 슬슬 재미없어지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는데 그 겨울, 큰오빠가 편지에 눌러썼던 다섯 글자가 떠올랐다. 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하는 문장들에서 집을 떠나 작은아버지네 머물러야 했던 열세 살 소년이 겹쳐 보였다. 키건의 소설에서 아이는 엄마가 출산을 앞두고 있는 집을 떠나 먼 친척집에 맡겨진다.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시골마을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 아이는 그곳에서 부모로부터 받지 못했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데, 처음 받아 보는 사랑이 낯설고 어색하다. 자꾸만 익숙한 불행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이를테면 이런 마음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축축한 침대에서 잠이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45)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70)


불행이 필연이라고 믿었던 아이는 아주머니, 아저씨와 행복한 한 계절을 보내며 불안에서 벗어난 듯 보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집에 가기 싫다는 당연한 마음 대신 차라리 집으로 빨리 돌아가 버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아무 기대도 희망도 없이 불행으로 결정되어 버린 상태가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도대체 그 어린아이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망과 절망을 경험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럼에도 눈부신 여름을 건너온 아이는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스스로의 의지로 달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용기를 낼 만큼. 내내 현재형으로 쓴 문장들에는 그 짧은 추억을 과거가 아닌 현재로 간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 집에서 사춘기를 보낸 큰오빠는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전에 없던 행복이 낯설었던 아이와 달리 큰오빠는 행복한 집을 떠나 낯선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골집에서의 겨울은 눈 쌓인 산에 찍힌 멧토끼 발자국을 따라 토끼 사냥을 하고, 전기불이 없어 깜깜한 밤이 되면 화롯불에 고구마나 밤을 구워 먹는 계절이다. 서울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인데, 그런 일들을 못 하게 된 것보다 더 막막한 일은 분명히 내 집이 아닌 곳을 내 집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겠다. 사촌동생들이 ‘큰오빠’라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 작은오빠‘라 부르는 아이와 동일한 입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방 두 개 있는 집에서 작은 방을 큰오빠에게 주고 우리 여섯 식구가 안방을 같이 쓸 때 안방에서 들려왔을 투닥거리는 소리들은 또 어떤가. 내가 어려서부터 굳게 믿는 게 하나 있는데, 외로운 사람이 책을 읽는다고. 오빠는 많이 외로웠던 거다. 많이 외로운 사람들은 글도 잘쓴다.


그러므로 ‘서울은 춥다.’는 대단한 문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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