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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수 없다면 무늬가 되자

《1차원이 되고 싶어》(박상영/문학동네)

by 박원형 Feb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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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에 앉아 뭘 보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일간지를 구독하던 시절에는 신문을 봤고, 종이 신문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일을 치르게 되었다. 힘을 빡 준 상태로 정치 동향을 읽고, 트렌드를 익힌다. 필요한 상품 검색도 하고 금융업무도 보는데, 가끔은 이런 자세로 이 일을 하는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개인의 사생활이 투명하게 오픈되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이 모습 또한 어딘가에서 공개되고 있진 않을까 불안해지던 어느 날, 나는 그 습관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빈손으로 변기에 앉아 욕실 타일 무늬의 규칙적 배열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몸에서 뭔가를 배출해 낸다는 것의 의미를 고찰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내 시선에 들어온 게 있었다. 타일 바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집게벌레였다. 집게벌레는 빈 욕실 바닥에서 자유롭게 놀다가 내가 들어오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넓은 바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숨을 곳을 찾는 모양인데 어디를 가나 광활하기만 하겠지. 한참을 헤매다 녀석이 정착한 곳은 입구 근처에 있는 타일 줄눈이었다. 줄눈은 하얗고 제 몸은 까만데 거기에 과감히 눕는 것이다. 오, 줄눈에 마치 때가 탄 것처럼 보인다! 그 상태로 내가 일어나 나갈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딱 붙어 있었다. 나는 보통, 집에서 벌레를 발견하면 휴지에 싸서 죽이는 편인데 그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줄눈에 누워 있으면 자기 몸을 은폐할 수 있을 거라는 집게벌레의 믿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집게벌레는 그 상태로 누워 있다 내가 나가면 더 좋은 보금자리를 물색할 테고 또다시 내 눈에 띄는 일은 없겠지만, 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변기에 앉아 있으면 그 집게벌레를 생각했다. 줄눈에 딱 달라붙어 때인 척하던 집게벌레, 숨지 못할 바에는 무늬가 되는 쪽을 선택한 그 결단력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무늬가 된 집게벌레를 생각하며 얼마 전 읽은 소설 속 인물 ‘이무늬’를 생각한다.      

이무늬는 박상영 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목이 훤히 드러나는 숏컷에 피어싱을 잔뜩 한 데다  담배 냄새까지 풀풀 풍기지만 성적은 제법 좋아서 학원 특목고 반에 다니는 무늬는 주인공 '나'가 밸런타인데이에 동성 친구인 윤도 자리에 초콜릿을 올려놓은 걸 알아채고, 그 일을 빌미로 친밀해지기를 강요한다. 순정만화의 세계를 가르쳐 주고 '캔모아'에 데리고 가서 눈꽃빙수를 사 주고 레즈비언 카페에 데리고 간다. 골치 아픈 가정사와, 멋진 언니와의 가슴 아픈 연애담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무늬는 내가 화장실에서 만난 집게벌레를 닮았다.  숨고만 싶은 '나'를  기어이 찾아내 같이 놀자고 하는 친구, 무늬. 무늬는 숨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잘 아는 것 같다. 그저 이 모양으로 태어난 김에 이 모양대로 살아가자고 작정한 그 기백이 멋지다.

집게벌레 하나 찾아오지 않는 적막한 화장실에서 나는 나의 무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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