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민음사)
살아온 날들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재미없고 맥 빠지는 대답을 하곤 한다. 젊은 시절의 불안과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이미 많은 것이 결정되어 버렸기에 변화가 적은 지금의 삶이 편안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삶이란 다르게 말하면 내가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 내린 삶을 말하는 것일 텐데, 이 지점에서 새삼, 줄곧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삶을 최선으로 꾸려나가지 못했다는 느낌은 괴로운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젊음이 또다시 주어진다 해도 나는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니 지나간 날들을 긍정하려 노력하는 수밖에.
가즈오 이시구로의《남아있는 나날》은 지금껏 헌신했던 삶의 방식에 일종의 ‘현타’가 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전쟁 후 영국 귀족인 달링턴 가문이 몰락하고 저택의 새 주인이 된 패러데이는 달링턴 가문에 온 힘을 바친 집사, 스티븐스에게 생애 최초의 여행을 권한다. 완벽한 집사가 되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스티븐스에게는 여행 또한 업무의 연장이어야 하므로 여행에도 생산적인 목표가 필요했고, 결국 스무 해 전 이 집에서 총무로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 복직을 권유하는 것을 목표로 6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이야기는 솔즈베리에서 웨이머스로 이어지는 현재의 여정과,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달링턴 홀에서 경험한 일들에 대한 과거 기억을 교차해 들려준다.
스티븐스는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면서 1인칭 화자이기도 하다. 대를 이어 집사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고 살아온 화자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과 가치관에 기반해 서술한다.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모신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집사의 화법은 자주 생경하게 다가오고, 독자를 집사와 동급으로 여기며 이야기하는 태도는 당혹스럽다. 이를테면 대화가 아닌 서술에서 만나는 극존칭이나, ‘여러분이 혹시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면...’(P.40)과 같은 문장이 그렇다. 흥미로운 지점은 스티븐스가 집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경험을 자랑스레 이야기할수록 그것이 자기기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의 중대한 결정들이 단순히 공적 논의의 장에서 혹은 국제 회담에 할애되는 불과 며칠 사이에, 대중과 언론이 속속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이 나라의 저명한 저택,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핵심적인 결정들이 내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P.149)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결심을 보라.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P.149)
스티븐스가 달링턴 가의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는 대신 은식기에 광택을 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아버지가 다락방에서 죽어가는 시간에 발이 아픈 손님을 돌보거나, 충직한 하녀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해고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동안,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에서는 수백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온유한 성품의 신사인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라는 진실을 마주한 스티븐스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가문에서 무엇을 했는지 당당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켄턴 양과의 만남에서 기대했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다.
손녀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달링턴 홀로의 복귀를 거절한 켄턴 양은 인생에서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순간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과연 켄턴 양답다. 켄턴 양은 평생 자기감정에 충실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꽃을 들고 찾아갔고 부당한 명령에 분노했으며 무능하거나 비겁한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사람은 자기 합리화 대신 아프게 성찰하는 쪽을 택한다. 반면 살아온 날들에 대해 회한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위대한 집사로 살았음을 강조하며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스티븐스는 애처롭다. 훌훌 털고 남아있는 날들을 멋지게 살면 좋겠는데. 아름다운 저녁 바닷가 선창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은 ‘직업적 권위’를 잃은 스티븐스를 이런 말로 위로한다.
“저런, 형씨. 손수건이 필요해요? 내가 어디 넣어가지고 왔는데. 아, 여기 있군. 아주 깨끗한 거라오. 아침에 내가 코만 한 번 풀었어요. 이걸 써요, 형씨.” (P.299)
소설 전체에서 줄기차게 질문했던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노인의 말에서 찾는다. ‘전문가적 실존’을 위해 ‘사적 실존’을 포기하는 것이 품위라고 여기며 감정을 숨기느라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스티븐스에게는 코 푼 손수건이 필요하다. 깨끗하고 말끔하게 다림질한 것이 아니라 누런 콧물이 묻은 것이라도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는 우선 손수건을 건네야 한다. 그 또한 한때 집사였던 노인의 가벼운 유머는 상대의 감정에 대한 공감에서 나온다.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손수건에 코를 풀고 “두 번 코 풀었어도 아직 쓸 만하다.”라고 농담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루 중 가장 좋은 저녁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집사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에게 맞는 집사가 될 준비를 한다. 세계 정세의 재편을 상징하듯 영국 귀족에서 미국인 사업가로 주인이 바뀌었고 이것은 집사로서 새로운 태도가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티븐스는 새 주인 패러데이가 좋아하는 농담의 기술을 연마하기로 결심한다. 선창에서 만난 노인의 유머를 배우지 못 한 스티븐스가 어디에서 농담의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 유머와 농담은 글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삶 전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이게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서 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