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비채
빵모자 계급론
직접 경험한 일만 쓴다는 아니 에르노를 맨 처음 읽은 건 지난해의 일이다. 북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만만한 분량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고른 게 《단순한 열정》이라는 책이었다. 나이 든 여자가 자기보다 어린 남자와 불륜 관계에 있으면서 그 남자에게 집착하는 내용이었다. 내면에 들끓는 욕망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그 글은 사회적 통념이나 윤리 기준에서 벗어나 있어 불온한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단순한 열정》 P.74/문학동네)
이 문장을 읽는데, 불륜의 애인에게 집착하는 그녀의 마음이 다르게 다가왔다. 말하자면, '이 여자 왜 이래'에서 '나는 이런 열정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로의 전환인데, 어떤 부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감정과 그걸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개인의 고백이 보편적 공감을 얻는 순간이다.
두 번째로 읽은 아니 에르노가 이 책, 《부끄러움》이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P.48)이라는 다짐을 증명하듯 작가는 과거의 경험과 그 당시 진행된 사회 현상들을 기술하여 소설을 완성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부끄러움은 비극적 역사 속에서 지식인이 느끼는 자괴감 같은 게 아니라, 흔히 '쪽팔림'이라 말하는 종류의 그것이다. 그 부끄러움은 부모로부터 비롯된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P.23)라는 다소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그날의 사건이 열두 살 소녀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야기한다. 그런 일을 저지른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하는 아버지에게 아이는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P.25)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불행한 사건을 겪은 이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받는 일을 의미한다. 아이는 이 사건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감지하게 된다.
그 세계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식당과 식료품점을 겸하는 부모의 가게와 집이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립학교이다. 학교에서 늘 1등을 하고 기도문을 줄줄 외워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아이는 그 학교에 다니는 다른 학생과 같을 수 없다. 그 사건 이후 부끄러움은 삶의 방식이 된다. 가령 노동자들이 마시는 능금주와 학교 기숙사에서 마시는 석류즙의 간극이 사회계층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든지, 청소 시간에 '볼레로'를 목청껏 부르다 그것이 천박함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해 그만두는 일 등 아이는 존재 양식의 모든 것이 경멸의 대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명명한 '아비투스'의 개념에 일치하는데, 개인의 취향이 살아온 배경에 의해 결정되고 다시 권력에 대한 계급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최초로 계급의식이라는 걸 갖게 된 날을 기억하는데, 조그만 머리에 위태롭게 얹힌 일명 '빵모자'에 관한 것이다. 집 앞에서 동생과 땅따먹기를 하던 나는 옆집에 사는 수진이가 빵모자를 쓰고 폴짝거리며 뛰어오는 걸 발견한다. 줄줄 흐르는 콧물을 소맷부리로 닦으며 수진이의 빵모자에 집중하는데, 수진이는 유치원 갔다 왔다며 아줌마 손을 잡고 집으로 쏙 들어갔다. 한동안 나는 유치원이 어떤 곳일지 상상하며 슬픈 시간을 보냈다. 빵모자와 유치원은 그 당시에 내가 엄마를 졸라 얻어낼 수 있었던 원피스나 머리핀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빵모자도 있다. 열 살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말끔한 제복에 빵모자를 쓰고 와 있었다. 걸스카웃, 보이스카웃이라고 했다.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나는 도대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알고 걸스카웃이 되어 빵모자를 쓰고 있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선생님이 걸스카웃 하고 싶은 사람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면 난 분명히 들었을 텐데. 물론 돈이 들어가는 일이므로 엄마는 시켜 주지 않았겠지만. 정보와 자본을 가진 걸스카웃은 다른 세계에 속한 아이들로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유치원을 다니지 않아도 걸스카웃이 되지 않아도 그리고 빵모자를 쓰지 않아도 즐겁게 지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베레모'라는 어른의 이름을 두고 그 모자를 여전히 '빵모자'라고 부른다. 그 이름에는 아직 각자의 생활양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천진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