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방 오지앙 / 위즈덤하우스
고통받는 자들은 살기를 바란다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투병기는 때로 도움이 된다.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으로 풀어 놓은 글들을 읽으며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도 된다. 대개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질병이라는 과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내용들인데, 《나의 길고 아픈 밤》은 결을 살짝 달리 한다. 이 책은 '고통 효용론'이나 '긍정 심리학'을 반박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별로 웃고 싶지 않은 날, 명징한 머리로 지금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싶은 날 읽었는데, 환자로서 뒤죽박죽인 사고와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 등이 은은하게 웃기고 죽음에 직면하기까지 철학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서술들이 감동을 주었던 책이다.
뤼방 오지앙은 이 책에서 자신의 췌장암 치료 경험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환자에게 기대하는 역할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역할들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육체적 질병이 우리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 혹은 질병을 통해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게 되고 고양된 인격을 가진 지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므로 환자의 역할은 그런 고통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고통효용론’이나 ‘긍정심리학’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의 미덕을 강조하는 사회는 사회적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게 되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숙명론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공감이 간다. 그리고 당장, 고통효용론은 실제 환자의 경험과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 불치병과 싸우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으므로 실존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말도 수긍한다. 관념적 사고는 미루어 두고 다만 생존하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환자에게 부여된 역할이 아닐까 싶다.
사실, ‘좋은 환자’ 역할 연기란 별다른 게 아니다. 자기와 의료진이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 있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노라 표를 내는 것이다. (36)
36페이지에 있는 저 문장을 보고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막연히 느꼈던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새로운 역할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환자라는 역할을 맡은 이상 좋은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환자는 의료진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환자를 말한다. 병원에서 제시한 날짜에 수술 받기, 주는 약 꼬박꼬박 챙겨 먹기, 검증 되지 않은 대안 요법 무시하기, 질문 많이 하지 않기. 요약하자면, 골치아픈 생각은 의사에게 맡기고 고분고분 말 잘 듣기. 가끔은 내가 의사가 아니라 환자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지만, 대체로 평온한 자세로 말귀를 알아듣는 환자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내 몸에 대한 정보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그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였다.
그런 환자를 의사는 어린아이 다루듯 하곤 한다. 요양병원의 주치의가 나에게 하는 질문들은 주로 밥은 얼마만큼 먹었는지, 잠은 몇 시간이나 잤는지, 심지어 대변의 모양과 크기가 어땠는지 물어보는 식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 오직 먹고 자고 싸는 일에만 집중해도 되는 그 시간이 나름대로 즐겁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치의는 평소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종교가 있나요? 종교를 가지면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화학요법을 이용한 항암치료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양도한 권력은 몸에 국한된 것이건만 마음까지 간섭하려 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마음을 아주 잘 돌보고 있다고 믿었다. 치료를 핑계로 장기간 얻은 휴식은 매사에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했고, 항암치료 정도는 거뜬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생애 최초로 삭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런 내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심신 안정을 위해 종교를 가지라니! 화가 났는데, 한편으로 그 상황이 정말 화낼 만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내가 과민한 건 아닐까. 어쩌면 마음 건강까지 챙겨 주는 그 다정함에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얻은 병에 대한 억울함을 꾹꾹 눌러 오다가 애꿎은 주치의에게 화풀이하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에 대한 분노는 간직한 채로 나는 옹졸한 나에게 실망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곧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혈관을 통해 주입된 파클리탁셀은 먹고 자고 싸는 일 모두를 방해했다. 나는 다시 어린아이 모드로 돌아갔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고통의 효용 가치를 기대했던 나는, 그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무책임하거나 불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철학적 탐구를 시작하면서 질병을 사유하는 방식에서 그놈의 '의미'에 대한 문제들을 완전히 털어 내는 편이 낫다고 보는 논증들을 제안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문제들은 합리적인 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203)
며칠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하더니, 기침이 계속 난다. 폐에 이상이 생긴 건가?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폐 전이 증상'을 쳐 본다. 해당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1년에 한 번 하는 정기 검진을 앞두고 일어나는 현상이다. 검진 전 나는 늘 어딘가가 아프고 검진 이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말끔히 낫곤 한다. 아마도 이런 불안은 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반복될 것이다. 내가 이토록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인 줄 몰랐다. 질병의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면, 니체가 말하듯 살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알게 된 것, 그것인 것 같다.
모든 고통받는 자들은 살기를 바란다. 성숙하고 즐거워하고 그리움으로 넘치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