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옴므 산장 가는 길

5화. 트레킹 2일 차: 레콩타민에서 본옴므 산장까지

by 예몽

비바람 치는 날, 산을 오른 적이 있는가? 이미 오르기 시작한 산길에서 되돌아갈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냥 오를 뿐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비바람을 뚫고 정상에 오르면 내 시야는 넓어지고 못할 것 같은 불안은 사라진다. 산을 오르기 전과 오른 후의 내 기준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본옴므 고개를 넘어 산장에 도달하면서 거북씨와 나는 좀 더 넓은 범위의 기준을 선물로 얻었다.



오늘은 레콩타민 마을에서 발므산장(1,706m)을 지나 본 옴므 고개(2,329m)를 넘어 본옴므 산장(2,443m)까지 가는 날이다.


레콩타민 마을은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 마트가 있고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몇 군데 있는 큰 마을이다. 어제저녁은 프랑스 사람들이 여유 있게 즐기는 레스토랑에서 퐁듀와 스테이크, 맥주를 시켜 저녁을 보냈다. 넷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식사로 늦도록 낮이 머무는 저녁을 누렸다. ‘퐁듀’를 주문하면서 프랑스 직원이 말하는 발음은 ‘홍쥬~’처럼 들려서 한참을 따라 말하며 웃었다.


잠은 역시 보약이다. 정신없이 잔 덕분에 새 힘이 생겼다. 좁은 숙소라 겨우 씻고 잠만 잔 다음,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을 순서대로 배낭에 챙겨 넣었다. 간식으로 납작 복숭아가 최고다. 아삭하고 달큰한 복숭아 과즙이 입안에 퍼지면 수분도 보충해 주지만 피로도 잠시 잊게 한다. 친구가 양보 못한다더니 맞는 말이다.

꺼내기 쉽도록 납작 봉숭아를 제일 위, 바깥쪽에 넣고 배낭을 메었다. 이제 적응되었는지 7kg이 넘는 무게도 거뜬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짐이 이 정도 무게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산 것은 아닌지, 집으로 돌아가면 비우고 단출하게 살아야지 생각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만 질 수 있도록 덜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레콩타민 마을에서 TMB(Tour de Mont Blanc의 약칭) 표지판을 따라 시작되는 길은 개울도 있고 걷기 좋은 숲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속에 ‘노트르담’이라는 성당이 나타났다. 동화 속에 나올 만한 작고 아담한 성당이다. 정성을 다해 조용히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따라 나도 마음으로 함께 해본다. 무탈하게 완주하도록 살펴주소서!

노트르담 성당 옆에 주인장의 성향이 보이는 깔끔한 카페가 있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먹을 수 있어 쉬어가기 좋은 카페다. 성당을 지나 발므산장까지는 꾸준히 오르막이라 산을 하나 오르는 듯하다. 어제도 산을 하나 넘은 듯했는데 오늘도 만만치 않다. 천천히 호흡과 체력을 조정하며 걸어야 한다.

TMB 길을 따라 걷는 트레커들이 우리를 앞질러 간다. 걷기도 숨차고 힘든 길을 놀랍게도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TMB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미소와 함께 ‘봉쥬~’로 인사 나눈다. 숱한 ‘봉쥬~’로 서로 응원하며 완주를 기원해 주었다.


TMB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다양하다. 가족끼리, 부자(父子)끼리, 때론 남, 여 각각 혼자서. 가장 놀라웠던 트레커는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등에 지고, 7살 되는 딸과 함께 걷는 젊은 엄마였다. 그녀는 놀라움을 너머 경외롭기까지 했다.

산에서는 세계가 모두 하나 되는 듯 마음이 쉽게 열린다. 언어만 자유로우면 더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을 텐데 간단히 인사만 나눈 것이 못내 아쉽다.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전나무 숲과 목장지대를 지나 발므산장이 보이는 풍광은 아름다웠다. 오름이라 힘들었지만 한발 한발 지나온 모든 길이 보물이 되었다. 뒤돌아보면 웅장한 산맥 사이로 보이는 길 위에 내 발자국이 지나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 풍광을 두고 갈 수가 없어 나는 연신 카메라를 눌렀다.


발므산장은 작지만 아름다웠다.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12시부터 점심메뉴가 제공되는 바람에 10시쯤 도착한 우리는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잠시 쉬었다가 식수를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후에는 비 예보가 있어 서둘러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므산장을 벗어나 조금 지나니 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본 옴므 고개를 향해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며 꾸준한 돌길 오르막이 이어졌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서둘러 비옷을 꺼내 입고 배낭을 정비했다. 내 채비를 마치고 거북씨가 옷 입는 것을 도왔다. 비옷을 입거나 벗을 때마다 배낭을 정비하거나 왼쪽 소매의 매무새를 잡아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혼자 하려고 애쓰는 거북씨는 나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트래킹 후반에서는 혼자 배낭을 정비하고 매무새를 가다듬기도 했다.


본 옴므고개를 향해 오르니 넓은 광야에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영상에서는 눈길이었는데 빙하가 녹았는지 비와 함께 흙탕물이 흘러 도로는 금세 빗물로 질퍽하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정면에서 받아치며 질퍽한 길을 걷는 것은 몇 배로 힘이 들고 지친다. 더군다나 고개를 오르니 기온까지 급격하게 떨어졌다.

작년 여름,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기도 했지만 기온이 내려가진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 해발 2,300m를 넘는 본옴므 고개는 기온이 내려가 스틱을 잡은 손이 어는 것처럼 굳기 시작했다. 몸이 차가워지면 근육이 굳어 걷기 힘들어지는 거북씨가 염려되었다. 길은 갈수록 좁고 질퍽하며 안개가 자욱했다.


비바람을 뚫고 본 옴므 고개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자연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인간을 후려칠 수 있을 거 같다. 한낱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순응하거나, 자연의 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짙은 안개 탓에 지나온 계곡의 전망을 볼 수 없었지만, 이 길을 지나온 우리에게 스스로 감격하며 스틱을 하늘 높이 들어 인증샷을 남겼다.

세찬 비바람에 지체할 수 없어 서둘러 본 옴므 산장으로 향했다. 산장으로 가는 길은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라 좁고 비탈지며 미끄러웠다. 심지어 건너야 하는 계곡의 물이 빙하가 녹은 물과 빗물로 불어나 차갑게 굳은 손가락의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바짝 긴장했다. 영상으로 보았을 때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길로 기억된다. 거북씨가 발을 잘못 디딜까 봐 뒤에서 살폈는데 다행히 한쪽 스틱으로 짚고 돌멩이를 디딘 다음 불어난 계곡을 실패 없이 건넜다. 나도 뒤따라 건너며 겨우 고비를 넘겼다. 빗물로 오름길이 미끄럽고 질퍽했다.

겨우 도착한 본 옴므 산장에는 실내와 바깥 모두 비 맞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손가락이 얼어 장비를 정리할 수 없었지만, 비에 젖은 옷가지들과 스틱, 배낭을 보관창고에 두고 간단한 짐만 챙긴 후 숙소 배정받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둘러 서서 몸을 녹이고 있는 난로 근처 테이블에서 카레맛이 나는 렌틸콩 수프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난로 주변에는 젖은 등산화들이 쌓여 있었고 좁은 빨랫줄 위에는 젖은 옷가지들이 널려있었다. 몸이 녹기 시작하자 얼었던 손이 간지럽고 부불어 올랐다.


한참을 기다려 배정받은 숙소로 갔다. 2층 침대가 있는 좁은 4인실 방은 히트도 없고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하는 곳이다. 해발 2,443m인 곳이라 모든 물자가 귀한 탓일 거다. 얼었던 몸을 찬물에 샤워할 수 없어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날, 본옴므 고개를 넘어 본옴므 산장에 머문 대부분의 트래커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일 거다. 그들은 더 넓은 자신의 기준을 가질 것이다. 거북씨도 비바람 치는 본 옴므 고개를 지나 본 옴므 산장에 도달했던 경험이 자신의 기준이 되어 남은 날을 살아갈 것이다. 낮은 기온으로 굳었던 근육으로도 좁고 비탈지며 질퍽한 길을 걸었던 자신을 기억한다면 더 다양한 환경이나 상황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해 보지 않고 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피하지 않는 경험과 실체 앞에서 사라지는 법이다.


본 옴므 산장 가는 길은 멈출 수도 없고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묵묵히 걷는 것만이 두려움과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귀한 경험이었다. 거북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트레킹 2일 차 지나간 길>

■ 레콩타민-노트르담 성당 - 발므산장(1,706m) - 본 옴므 고개(2,329m) - 본 옴므산장(2,443m) /13.7km, 6시간 소요


■ 노트르담 성당부터 발므산장까지 계속 오르막


■ 본 옴므 고개에서 산장까지는 한 시간을 더 걸어 능선을 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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