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칠하는 붓길 따라

6화. 트레킹 3일 차: 본옴므 산장에서 엘리자베타 산장까지

by 예몽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구간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다. 본 옴므 산장에서 엘리자베타산장까지 14km를 계획했는데 엘리자베타 산장 예약을 성공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13km나 더 떨어진 메종 비 에이 산장까지 26km가 넘는 길을 하루에 걸어야 다. 평길도 아니고 1,000km의 고도를 오르내리는 산길이라 일행 모두 출발 전부터 이 날이 부담되었다.

어젯밤, 거북씨와 나는 본 옴므 산장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몸살 기운이 느껴져 약을 먹고 정신없이 잠들었다. 본 옴므 고개를 넘고 산장에 도착하는 동안 모든 체력을 소진한 탓도 있지만, 26km를 걸어야 하는 오늘을 대비해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오늘 일정을 위해 방법을 물색하고 다녔던 친구의 수고를 알게 된 건 아침이 되고 나서였다.


친구는 26km의 노선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피곤한 몸을 참고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원래 계획했던 포르고개 쪽으로 가지 않고 레사피유마을로 내려가 버스를 타고 글래시 마을까지 가는 방법을 다른 트레커를 통해 알아왔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전해주는 친구 얘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무심하게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그제야 알았다. 내 코가 석자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체력보충부터 하다니, 친구 볼 면목이 없다.


어제 그토록 바람이 불고 비가 세차게 오더니 아침 하늘은 잔뜩 흐려있다. 구름 떼는 이 골에서 저 골로 비현실적으로 몰려다니고, 산장 주변은 선선하게 부는 바람으로 11월 날씨를 연상시킨다. 춥기도 하고 레사피유 마을에서 버스를 타야 했기에 본옴므 산장을 얼른 벗어났다. 산장에서 레사피유마을까지는 내리막이 이어졌고, 서둘러 내려가는 친구부부를 뒤따랐다.

아침 해를 받으며 레사피유마을로 향하는 길은 올랐던 고도를 다시 내리는 구간이라 실처럼 굽어진 길을 끝없이 내려간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 서늘한 산기운에 자라지 못한 풀들이 야생화들과 함께 융단처럼 깔려있다. 숱하게 지나간 트레커들이 만들어 놓은 길 위로 나도 지나간다. 지나는 구역마다 한 폭의 그림이라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고, 나는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을 왜 걷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까. 이 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내게는 이유가 된다.


맨날 보는 풍경, 맨날 걷는 길을 벗어나 자연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바라보는 것.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습관에서 벗어나 예술을 찾는 정신의 허기를 해소하는 것. 미술관을 찾아가는 이유와 같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슴 뛰며 바라볼 풍경을 찾아가는 여정이지 않을까. 적어도 이 길을 걷는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자연은 내게 말하는 듯하다.

'내가 만든 작품을 보러 오지 않을래?'

그 소리에 이끌려 끝없이 이어진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버스를 놓치는 것이 우려되어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거북씨는 앞선 일행을 따라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한다. 나는 앞선 일행의 꼬리가 보이는 지점과 거북씨가 내 꼬리를 놓치지 않는 적당한 지점 사이를 유지하며 걷는다. 혼자 거북걸음으로 내려오는 그의 모습은 존경심과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걸음이 많이 빨라졌어~!”

가는 길을 멈추고 잠시 뒤돌아보며 응원하는 내게,


“빨리 걷는 거 같지? 마음은 달리고 있다.”


풍경은 한 없이 광활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거북씨는 발아래를 보고 걷느라 풍광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에 쫓겨 내려가기 바쁘다.

부지런히 걷고 있는 그를 보니 미안해진다. 각자의 속도대로 걸으면 될 것을, 그에게 너무 무리한 짐을 지게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옮기는 한 걸음의 무게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늘 그에게 더 넓고 높은 기준만 외치진 않았는지.

5km의 내리막길을 달리다 싶게 걸어 레사피유 마을에 도착했을 때, 9시 10분 전에 도착하여 겨우 9시 차를 탈 수 있었다. 다행히 일행 모두 버스를 타고 글래시마을에 도착하여 걷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모테산장을 지나 세이뉴 고개로 가는 길은 또 가슴 벅찰 만큼 아름답다. 사진에 다 담지 못하는 풍경은 마음속에 저장하고, 퇴색해질 기억을 위해 동영상도 열심히 찍었다. 발아래만 보고 걷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거북씨에게 내가 본 풍경을 사진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세이뉴 고개를 향해 가는 길에서 빙하가 녹아내리는 계곡을 만났다. 바로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한 물에 살짝 발을 담가본다. 얼음처럼 차갑다. 발을 잠깐 담가기만 했는데도 피로가 물 따라 내려간 듯 개운했다. 쉬지도 않고 달려온 여정 이어서일까? 잠깐의 휴식이 꿀맛이었다.


맞바람을 헤치며 세이뉴 고개를 오르는 길은 역시나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바람과 안개를 헤치고 도착한 세이뉴 고개는 경계석으로 보이는 돌탑 하나만 놓여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계를 표시하는 구간이지만 몹시 미니멀하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경계가 그러한 것처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도 요란하지 않다.

세상에 와 잠시 머물다가는 곳에서 니꺼 내꺼 선 그어놓고 사람 세워 구역을 지키는 일은 번거롭다 못해 무용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거북씨와 나는 정상에 오른 듯 감격스러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또 하나의 고개에 도달한 기쁨도 잠시, 비에이 산장까지 갈길이 바빠 서둘러 내려갔다.


눈앞에 놓인 풍경은 안개와 구름을 섞어 하늘에다 마구 칠해놓은 듯하다. 힐끗 보이는 꼭대기로는 설산이 보이고, 중턱에는 7월 날씨에 빙하가 녹아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내린다. 내 짧은 표현력이나 오래 저장하지 못하는 기억력으로 오늘이 지나면 나는 이 풍경을 떠올리지 못할 것 같다. 사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끝없이 아래로 이어진 평원 어디쯤 체력이 바닥난 지점에 저 멀리 엘리자베타산장이 보인다. 내려간 길에서 한참을 다시 올라야 하는 언덕에 산장이 위치해 있다.

저만치 보이는 산장에 도달하는 걸음이 천근 같다. 엘리자베타 산장을 지나 다시 비에이 산장으로 가야 하는데 대장이 굳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엘리자베타 산장에 오르고 있다. 쉬어가려고 하나보다 싶어 남아있지 않은 체력을 쥐어짜서 따라 오르는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서둘러 비옷을 챙겨 입고 무조건 엘리자베타 산장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비에이 산장으로 바로 가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비에이 산장까지는 4-5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쉬었다가 체력을 보충해서 다시 5시간을 걸을 각오로 거칠어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엘리자베타 산장 입구에 도달하는데 먼저 간 대장이 소리친다.

“산장에 방 있다!!”


“와~!!”

너무 기쁜 나머지 스틱 든 두 팔을 높이 들어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렇게 예약이 되지 않아 걱정덩어리를 안고 발걸음을 재촉시켰던 엘리자베타 산장에 이층 침대 두 개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던 거다. 우리를 앞질러 바쁜 걸음으로 서둘렀던 친구 부부는 엘리자베타 산장에 숙소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그제야 우리에게 말한다.

엘리자베타산장이 언덕 위에 위치해서일까? 몹시 거친 바람과 거센 빗줄기를 산장이 다 받아내고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체력이 바닥난 지금, 이 비바람을 뚫고 다시 5시간을 걸어 비에이 산장에 도달하는 것은 거북씨나 우리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최선을 다해 걸었더니 하늘도 감동해 주었을까? 그래, 수고했다. 옛다, 행운 하나 던져주마! 하늘이 선심 쓰듯 행운을 선물로 던져준 거 같다.

심지어 엘리자베타산장은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비록 쓸 수 있는 따뜻한 물이 20리터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저녁을 먹은 뒤 빛의 속도로 기술껏 샤워를 했다. 본 옴므 산장에서 엘리자베타산장까지 도달한 오늘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산장 주변에는 빗소리인지 빙하수가 떨어지는 폭포소리인지 모를 물소리가 밤새 요란했다.



<트레킹 3일 차 지나간 길>

-본 옴므 산장-레사피유마을-글래시마을- 모테산장-세이뉴고개-엘리자베타산장/19.5km, 7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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