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트레킹 4일 차: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꾸르마이외르까지
트레킹 중에 무탈하게 걷기만 했다면 풍경만 기억날 것이다. TMB 풍경은 내 짧은 표현력으로 다 나타내지 못해 사진으로 대신하고 싶을 만큼 경이롭다. 풍경은 당연하고 비록 흑역사이긴 하지만 양념 같은 에피소드도 생겨 내게 특별한 트레킹이 되었다. TMB 4일 차는 꾸르마이외르에서 사소한 일로 흑역사를 남긴 날이다.
엘리자베타 산장은 폭풍의 언덕을 떠오르게 한다. 거대한 산 중턱 어디쯤, 언덕 위에 산장이 위치해 있다. 그날의 날씨가 그랬는지, 언덕 위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서 그런지 밤새 비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산장의 오른편에 빗물과 녹아내리는 빙하수가 더해져 큰 규모의 폭포가 흐르고, 산장 앞으로는 콤발 평원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출입문을 막고 있어 아예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내려오자 숙소를 예약하지 못한 트래커가 산장 출입구에서 비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 7시가 넘고 비바람이 거세자 그는 입구 발코니에서 밤을 지새울 모양인지, 텐트를 치기 시작한다. 산장을 예약하지 못했다면 우리도 저와 같았을 거라고 일행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저녁으로 산장에서 준비해 둔 식사는 와인을 부르는 유럽식 간편 식사였다. 와인이 들어갔고 행운이 따라주었던 숙소라 오늘 여정을 얘기하며 늦게까지 여독을 풀었다. 산장 예약에 성공해서인지 와인 덕분인지 대장의 기분이 업되어 대학 신입생 시절 이야기부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이장희 노래로 지금의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순간까지 풀어놓았다. 모두 주고 싶은 대상을 20대에 만나 사랑을 하고, 태풍 같은 젊은 날을 보낸 뒤 지금까지 함께 여행한다. 비바람 속에서 마지막 남은 4개의 침대를 예약한 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행운이 따라준 두 사람의 삶이다. 젊은 날과 사랑 이야기로 적당한 취기가 오르고, 트레킹의 피로가 겹쳐 숙면의 밤을 보냈다.
트레킹 4일 차가 시작되는 날 아침, 비바람은 멈추지 않고 더 거세다. 대자연의 거친 호흡 같은 바람을 산장에서 구경하고 천천히 나서고 싶었지만, 대장은 등산화 끈을 매고 나설 채비를 한다.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식당에 앉아 있는 트레커들의 눈을 의식하며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산장을 나섰다. 비바람을 맞서며 한참을 내려오니 바람이 잦아든다.
산장 옆으로 흐르던 빙하수는 넓은 평원으로 흘러 콤발 호수를 이룬다. 콤발 호수까지는 평지라서 편안하게 걸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콤발 호수를 지나 몽테 파브르 중턱으로 다시 올라 메종비에이 산장을 거처 꾸르마이외르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계획을 수정하여 쉽게 가는 쪽을 선택했다. 비가 오기도 했고 그동안의 피로가 쌓인 탓이기도 했다.
라비사일레 마을까지 포장된 도로를 걷기도 하고 산 허리를 돌아가는 숲 속 둘레길도 걸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도 잦아들더니 날씨가 점점 맑아져서 숲길을 걸으면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엘리자베타 산장을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둘레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동차 도로가 있다. 도시 관광세로 운영되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는 곳에서 한참을 기다려 꾸르마이외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혼자 여행하는 26세의 잉글랜드 여자를 만났다. 간단한 영어로만 소통할 수 있어 아쉬웠다. 그녀는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예뻤지만, 혼자서 TMB를 도전하는 모습이 더 멋있고 아름다웠다.
꾸르마이외르에 도착하니 날씨가 화창한 점심 무렵이다. 맛집 정보를 알고 찾아가는 대장을 따라 피자집에 들어갔다. 접시에 다 담기지도 못할 만큼 크고 납작한 피자가 이곳이 이탈리아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탈리아 피자는 이렇구나 싶어 새롭기도 하고 맛도 좋았다. 넷이서 두 개의 피자를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양이 많았는데 현지인들은 1인 1 피자를 접시에 담아 먹고 있어 신기했다.
피자로 점심을 해결하고 아이스크림 맛집에 들러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배는 부르고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트레킹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더군다나 따스한 햇살이 꾸르마이외르를 내리쬐는 7월의 오후이지 않은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꾸르마이외르에서 묵을 호텔의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내 몸은 땅 아래로 꺼져갔다.
순전히 꾸르마이외르의 그날 날씨 탓이라고 변명해 본다. 날씨가 쨍하고 쾌적하게 부는 바람에 잠시 정신을 잃어서 그랬다고 말이다.
호텔 체크인을 한 뒤, 새하얀 이불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렸나 보다. 더구나 4일간 진행된 트레킹과 산장에서 보낸 여정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를 리는 없지. 이 모든 걸 갱년기 우울증 탓으로 돌려야 하나. 갱년기 우울증보다는 햇살과 바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모양새가 좀 낫다.
이 쨍한 햇볕에, 쾌적하게 살랑이는 바람결을 이불 삼아 새하얀 시트 위에 몸을 누이고 싶었던 거다. 새햐얀 시트에 누워 햇살이 지나가는 꼬솜한 기분을 누린다면 하늘 위 구름 속 같지 않을까?
하지만, 4일째 누적된 옷가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음 여정을 위해 빨래를 해야만 했다. 호텔에서 손빨래를 하느니 걸어서 5분 거리에 코인을 넣고 운영하는 빨래방을 찾는 것이 당연했다. 내 속마음을 모르는 세 명의 의견이 딱, 합의되었다. 3대 1.
다음 여정을 위해 빨래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에 따른 내 이성은 하얀 이불 위에 누워 꼬솜한 햇살을 느끼고 싶은 내 감정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거북씨와 대장이 샤워하는 사이 친구와 나는 빨래를 챙겨 들고 빨래방으로 갔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으려고 보따리를 풀었는데 갈아입은 내 옷가지만 들어 있고 거북씨의 빨랫감은 딸랑 윗옷 두 개뿐이지 않은가! 숙소까지 다시 빨랫감을 가지러 가야 하나? 5초간 망설이다가 따가운 햇살을 헤치고 갈 여력이 없어 코인을 넣고 그냥 세탁기를 작동시켜 버렸다.
‘내가 없으면 거북씨는 샤워하고 벗은 옷을 알아서 손빨래하겠지?’
게으른 내 감정은 이성을 무력화시키려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만다.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감정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빨랫감을 몽땅 들고 거북씨가 빨래방에 나타난 것이다. 아, 그날 꾸르마이외르 햇살은 너무나 강렬하고 바람은 쾌적했다. 작동 중인 세탁기를 멈추게 할 수 없어 허탕치고 돌아간 거북씨가 호텔 발코니에 널어둔 빨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도 금방 말랐기 때문이다. 물론, 옷감들이 경량이거나 기능성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꾸르마이외르의 시원한 초저녁 정취를 누리지 못했다. 낮에 먹었던 피자 맛집에 다시 들러 저녁을 먹었지만 거북씨의 불편한 심기에 눈치가 보여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꾸르마이외르의 강렬한 햇살과 쾌적한 바람 탓이다. 그 때문에 철없이 촐싹대는 내 감정은 이성이 판단하지 못하게 정신 줄을 놓게 만들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본다.
꾸르마이외르의 밤은 불편한 심기로 꼬여버린 기분과 누적된 피로를 탓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기엔 너무나 아쉬운 이탈리아의 밤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4일 차의 밤은 유럽의 밤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과 동행자에게 기분을 전념시킨 미안함을 안고 그렇게 흑역사로 남았다.
<트레킹 4일 차 지나간 길>
■ 엘리자베타 산장(2,197m)-Combal콤발 평원 및 호수- 라비사일레 마을- 숲길 끝나는 지점에서 버스 타고 꾸르마외르(1,228m) 도착/14.15km, 4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