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놓인 길, 내게 주어진 삶

4화. 트레킹 1일 차: 샤모니에서 레콩타민까지

by 예몽

트레킹 첫날, 트리콧 고개를 넘고 미아지 산장을 지나 레콩타민 마을까지 가는 일정이다.

따뜻한 물이 제한 없이 나오는 숙소에서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이라 산뜻하게 화장한 얼굴로 아침 일찍 숙소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산꼭대기를 빨갛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아침햇살은 우리의 트레킹 시작을 축복해 주는 응원의 빛으로 보였다.


숙소에서 레우슈마을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벨뷔 고개까지 케이블카로 가서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한다고 대장이 알려준다. 트레킹 1일 차라 일행 모두 설렘 반, 열정 반으로 버스 오기를 기다렸다. 버스야, 얼른 와라. 내 심장 터지기 전에.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는 벨뷔고개에서 9일 중 가장 밝고 환한 표정으로 넷이 첫출발을 기념하는 사진을 남겼다. 넷다 보송보송하고 편안하며 산뜻한 화장기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귀한 사진이다.


둘레길이 시작되는 초반은 우리가 그동안 걸었던 둘레길처럼 편안했다. 영상으로 예습했던 길이라 주변 경관을 보며 사진을 찍는 여유도 보였다. 알프스 산맥의 7월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가, 어느새 나타난 구름 떼들로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초반을 지나 트리콧 고개를 향해 가는 길은 숨이 찰만큼 경사가 있기도 했고, 이게 트레킹이지 싶게 아슬하고 좁은 길을 지나는 구간도 있었다.

주변 산을 보며 감탄하거나 사진으로 남기며 여유롭게 걷는 나와 달리, 내 앞에서 걷는 거북씨는 부지런히 가기 바쁘다. 풍광을 볼 새도 없이 자기 앞에 놓인 길을 한발 한발 옮겨놓아 오늘 분량의 길을 완주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쉬지 않고 걸어도 앞서 가는 일행들과 거리 차이가 한참 난다. 뒤돌아보며 잘 오는지 확인해 주는 일행들의 몸짓이 고맙고 뭉클하다.


둘레길이라지만 산행하듯 오름이 있다. 첫 번째 정상 같은 트리콧 고개에서 어제 마트에서 산 먹거리로 배를 채웠다. 과연 납작 봉숭아는 배신하지 않은 맛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었던 길 위의 트레커들이 배낭을 풀어놓고 여유롭게 쉬는 모습이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트리콧 고개를 넘으니 미아지 산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진다. 오름보다 더 힘든 가파른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등산스틱이 없으면 중심을 잡는데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무릎에 무리도 갈 만큼 경사가 심하다.

거북씨는 왼손으로 스틱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오른손으로만 스틱을 잡고 걷는다. 오른쪽 스틱으로 중심을 잡고 오름길과 내리막길을 가야 하기에, 쇳덩이를 달고 걷는 듯한 왼쪽 다리의 무게와 합쳐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트레킹이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헛디디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어 걸을 때 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알프스 산맥의 풍경을 눈으로 담아본다.

거북씨가 걷는 이 길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몽블랑이 주는 몽글몽글한 느낌에 취해 무작정 걷기로 결정한 길이 아니라 신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재활의 길이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의 길이다. 하루 분량의 완주를 매일 해내고, 170km의 몽블랑 트레킹을 완성하여 자신감을 얻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7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한쪽으로만 스틱을 의지한 채 내리막길을 가는 거북씨의 걸음을 보며 각자가 감당해 내야 할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가야 하고 각자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과 닮았다.

트리콧 고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에 미아지 산장이 있다. 처음 만나는 산장이라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 땅에는 야생화가 있는 이곳은 트레커들이 주로 그날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신발을 벗고 썬베드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첫날이긴 했지만 찬란한 햇살을 올려다보며 아직은 해볼 만하다 생각했다.


미아지산장에서 물을 채워야 했는데 식수대를 찾지 못한 나는 물병을 채우지 못하고 길을 나서는 실수를 했다. 트룩산장을 지나 레콩타민 마을까지 가는 길은 7km가량의 내리막 구간이다. 오후의 햇살은 강했고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지치기 시작했다. 물을 보충하지 못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내리막 자갈길을 걷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이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서 산 아래로 내려오니 숲이 끝나는 지점에 레콩타민 마을이 나타났다.


오늘 걷기 분량이 끝나나 했는데 마을로 접어들어도 길 찾기 앱은 계속 가라고 안내한다. 마을 중심부까지 도착했는데, 숙소까지는 다시 2km가 남았단다. 첫날이기도 했지만 뜨거운 햇살아래 끝난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갈 길이 이어지니,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다들 지쳐갔다.


지도로 찾아간 숙소에서 입구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말이 통하는 한국이라면 속 시원히 물어라도 볼 텐데... 한 톨의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여곡절 끝에 숙소를 찾아낸 친구부부를 존경한다. 겨우 잠만 잘 수 있는 좁은 숙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으로 체력을 충전해야 내일의 태양을 맞이할 수 있으니. 어떻게 밤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트레킹 1일 차 지나간 길>

■ 샤모니- 레우슈- 레콩타민 / 16.3km, 8시간 소요

■ 샤모니-벨뷔고개 -트리콧 고개 - 미아지 산장-트룩 산장-레콩타민 마을


■ 벨뷔까지 케이블카로 이동하여 트레킹 시작- 트리콧고개, 해발 2,120m 고갯길을 오름- 트리콧 고개에서 미아지 산장까지 내리막, 미아지 산장에서 휴식- 레콩타민까지 내리막-레콩타민에서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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