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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울리 Slowly Jun 08. 2022

진심을 전해본다  

진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어라



나는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몰랐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속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불통이 되고 견고한 벽이 생긴다.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때로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서 오해의 골은 깊어간다. 소중한 사람과 대화할 때 진심은 늘 가슴 한편에 묻어 둔 채, 겉도는 대화를 해왔던 시간이 정말 후회스럽다.



다섯 살 무렵 나는 사랑스러운 둘째 딸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우체국에 근무했던 아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대문 앞에 내복 바람으로 꾀죄죄하게 않아 "아빠!"하고 제일 먼저 아빠를 반겼다고 했다. 그런 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아빠가 제일 부담스러워하는 딸이 되어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의 집과 우리 집의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유값이며 급식비조차 제때 내지 못해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를 때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화가 났다. 돌아보니 그런 내 불편한 감정을 풀이하기 위해 아빠를 더욱 원망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늦은 오후 집에 들른 아빠가 집 꼴이 이게 뭐냐며 한마디를 했다. 집안일을 솔선수범하지 않는 아빠의 말에 은근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아빠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며 대들기 시작했고 부녀 관계는 점점 나빠졌다. 나는 제때 학비를 내주지 못하는 아빠가 싫었친구들에 비해 초라한 집에 살고 있는 것 역시 아빠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여겼다. 엄마가 밖에서 고생하는 것도 그의 탓이었고, 따뜻한 말이나 칭찬에 인색한 아빠가,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말투가 투박스러운 아빠가 정말 싫었다. 한 집, 별로 크지 않은 공간에 함께 살면서도 아빠와의 거리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져 갔다.



내가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아빠는 “나와도 돈도 안 되는 대학을 뭣 하러 가려고 하냐, 돈이나 벌어서 집에 좀 보태지” 했다. 대학 입학금을 모으기 위해 주말과 방학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애를 썼는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나는 악을 쓰며 “낳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하고 따져 물었다. 우리 부녀의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20대 중 후반을 넘어가면서 종종 아빠 생각을 했다. 내 한 몸 먹고 살기에도 이토록 힘이 든데, 아빠는 그동안 어려운 형편에 다섯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렸을까? 잠이 많은 편인 아빠가 가끔 새벽에 잠 못 이루고 대문 밖을 서성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기 자식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부모는 누구도 없다는 걸 아주 조금씩 이해해갔다.



그 이후에도 아빠와 나는 소리치고 비난하며 서로 가슴에 상처 주는 일들을 반복했지만, 점차 그 고리를 끊어내는 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가 언성을 높였고 또다시 심장이 뛰면서도 답답해져 왔다. 하지만 이전과 방식을 바꾸어 이야기했다. 눈물을 참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빠, 내가 밖에서 항상 주눅 들어 있고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힘들어. 아빠가 나를 좀 더 인정해 주면 좋겠어.”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차근히 내 진심을 입 밖으로 말했다. 무엇보다 아빠를 더 이상 무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다. 아빠는 여전히 화가 난 듯 몇 마디 더 했지만 당황스러운 듯 곧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아빠와 다투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빠가 언성을 높이면 받아치지 않고 적당히 자리를 피하는 기술을 익힌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아빠에게 대들었던 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몸부림이었다는 걸 아빠도 어렴풋이 알아 차린 듯했다. 내가 상대로부터 바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요청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아빠는 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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