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느낌으로 남은 산, 함백산

백두대간 4

by witsfinder

현실 같지 않은 선명하게 파란 하늘이다. 얼어붙은 눈이 하얗게 감싼 자작나무 사진을 찍었다. 좁고 가파른 등산로를 거쳐 정상에 올라왔지만, 다시 길로 내려가면 미끄러울 것 같아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멀리 돌아서 가기로 했다.


경사진 눈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집중하며 걸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길 모퉁이를 돌 때 멀리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가장 앞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인 소녀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다가왔다. 등산장비도, 장갑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다. 인적이 드문 이 높은 산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또 다른 한 명은 조금 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어린 흑인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선 소녀와 달리 굳은 표정에 경계하는 눈빛으로 지나갔다. 모자를 눌러쓰고 두툼한 방한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나를 두려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라도 내렸어야 했을까.


이런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건넸으면 좋았을 텐데. 낯선 사람에게도 미소로 인사하는 문화 속에서, 그 문화에 맞추어 행동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되는 것 같다. 마치 의식적으로 팽팽하게 당겼던 고무줄이 힘을 놓는 순간 제자리로 돌아가듯 원래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그들이 오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 따라오는 사람은 중년의 한국인 여자 스님이었다. 그분은 서로 지나치는 짧은 시간에 정상에 등산로를 거쳐 올라갔었는지, 이 포장도로로 정상까지 가는 길이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아마 저들은 산 밑 사찰에서 템플스테이하는 외국인과 안내하는 스님인 것 같다고 그 예기치 않은 상황을 정리했다. 내려오면서 그들 외에는 마주친 사람이 없었다.


함백산 해발 1,572미터. 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여러 차례 올라갔었다. 산정상에 서서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경상북도 봉화, 강원도 영월, 사북, 정선, 삼척, 태백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북쪽 매봉산에서 두문동재, 남쪽 가까이 태백산과 멀리 소백산 자락을 잇는 백두대간이 한눈에 보인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국가대표 선수촌이 있다. 이 고립된 고지대에서, 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경기종목에서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외로움과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며 훈련하고 갈 것이다.


해발 1,350미터까지는 자동차로 오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인이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2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정상에 도달한다.


그 25분 등반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초반의 완만한 구간을 잠시 걷고 나면, 격렬한 호흡과 다리 근육의 떨림을 이겨내야 하는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 그렇지만, 도봉산 높이의 2배가 넘는 이 산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등산으로서는 효율적이기도 하고 다소 반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 그늘 아래, 가지에 앉아 자는 듯 움직이지 않고 쉬고 있던 이름 모르는 새. 하늘 높이 올라 거센 바람에도 의연하게 날개를 펴고 균형을 잡고 있던 매 한 마리. 4월 말 눈 속에서 피어나던 꽃. 이런저런 기억들이 담겨 있다.


누군가와 같이 오를 때는 함께 나눈 이야기와 웃음이, 혼자 오를 때는 생각과 고민이 남아 있는 곳이다. 단순히 사진 파일과 머릿속 기억이 아니다. 자연이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을 때마다 오르내리면서 몸의 느낌으로 남아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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