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호수에서 단상
좋은 자동차, 좋은 가전제품, 좋은 옷, 좋은 아파트...
사물을 일컬어 ‘좋다’라고 할 때는 대개 성능이 뛰어나거나 나에게 이로움을 준다는 ‘유용성’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반면 ‘좋은 친구’, ‘좋은 상사’ 등 사람에 대해 ‘좋다’고 할 때는 흔히 인성의 선(善)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잘해주거나 이득이 된다는 유용성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좀 더 가까운 관계에 대해 보자.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형제’라고 할 때 그 ‘좋음’에는 과연 유용성의 의미가 전혀 없을까? 그 말도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함'과 함께 '사랑'에 관해서는 오래전 읽은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국에 부모님을 두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여행하던 한 젊은 귀족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북쪽 어느 나라 성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아름다운 백작 부인을 발견한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자녀와 살고 있었다. 그 젊은 남자는 한동안 그 성에 머물며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의 아이들도 애정으로 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계속 같이 살기에는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다. 어느 날, 떠나야만 했던 남자는 '우리를 지켜보는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하고는 떠났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남자는 다시 그 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여인은 병들어 창백한 모습으로 침실에 누워 있었다. 아이들의 행방을 묻자, 그녀는 고통스럽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고 방해가 되는 네 개의 눈이 바로 자신의 두 아이라고 생각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남자는 극심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바로 성을 뛰쳐나와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녀의 생명마저 희생시킨 그 강렬한 사랑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시는 그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고향에 연로한 부모가 있었다. 전통과 체면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부모님이 타국의 미망인과 결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자유로운 몸으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네 개의 눈’을 말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전해지는 민담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를 어느 신문에서 읽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는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광적인 사랑이 있고, 추악한 사랑이 있다. 육체적인 욕망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인간의 언어는 생각보다 정교하지 않다. 같은 말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각자의 생각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한다.
매서운 영하의 날씨, 차갑게 출렁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들의 의미를 좀 더 냉철하게 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