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와 때죽나무

이름과 존재에 관한 짧은 생각

by witsfinder

'마로니에'를 간절하게 부르는 가요가 있었다. 음악을 FM 라디오로 듣던 시절에도, 그 노래는 이미 세월이 몇 겹 쌓인 오래된 곡이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 듯

···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는 날···"


무언가 아련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 노래 때문에 마로니에는 나에게 낭만과 그리움의 상징이었다.


몇 년 전, 식물학 전공 교수가 강의시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마로니에는 사실 '칠엽수'라고 했다. 두 나무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대학로 등 우리나라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대부분 칠엽수인데, 그 노래 속의 마로니에는 칠엽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금도 칠엽수 꽃은 피고 있겠지···"

프랑스어 마로니에(Marronnier)가 주는 느낌과 확실히 다르다. 어감이 다르고, 그 시절 우리가 동경하던 이국적인 정서가 스며들 자리가 없다.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니는 산길이 있다. 도심 속의 낮은 산이다. 사무실에서 왕복 6킬로미터 거리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져 있어 절반은 뛰다시피 한다.


어느 모퉁이를 돌면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 나무를 만났다. 다른 나무에 비해 잎이 늦게 피어났다.


5월 어느 날, 그 나무에 옅은 초록색 잎이 무성하게 돋았고, 작고 하얀색 꽃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봄비에 젖어 고개를 숙인 꽃들은 함께 모여 재잘거리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나무 이름이 궁금해져서 검색해 보았다.


'때죽나무'였다. 귀여운 꽃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이름은 사물에 붙이는 언어일 뿐인데, 이렇게 때로는 그 본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낸다. ‘마로니에’는 기억 속에서 낭만으로 남았고, ‘때죽나무’라는 투박한 이름은 그 귀여운 꽃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언어라는 표면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이름이나 호칭은 존재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름 너머에 있는 대상 그 자체를 온전히 바라보는 일이다. 때죽나무라는 예스러운 이름 뒤에 숨겨진 그 작고 하얀 꽃망울의 순수함을 마주하면 되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나무는 변함없이 꽃을 피울 것이다.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나는 이번 봄에도 다시 그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