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본다는 착각

현상과 인식

by witsfinder

산 정상에 올랐다. 멀리 보기 위해서다. 미세먼지가 낀 4월의 대기는 산과 호수가 흐릿하게 보이게 했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난 후, 다시 그 산을 올랐다. 기어이 맑은 풍경을 보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강박이었다. 깨끗해야만 제대로 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잡음을 없애야 하듯, 사물을 정확하게 보려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모든 것이 선명했다. 기분은 상쾌했다.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먼 산들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맑아진 풍경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야에 걸리는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해서 과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까? 어쩌면 '있는 그대로'라는 말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인식의 가정이 아닐까?


섬으로 이어진 출렁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작은 점처럼 보였다. 골짜기를 따라가는 강을 막아 만든 거대한 호수는 고여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조용히 흐른다. 호수 바닥에는 상류에서 떠 내려온 흙과 모래가 끊임없이 퇴적될 것이다. 보이는 것과 달리,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은 드러난 형태로만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반세기 전에 호수에 잠겨버린 강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과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알 수는 없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사물을 객관적인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드러나는 방식대로 경험할 뿐이다.


우리는 이물질이 포함된 세계 속에서 현실을 인식한다. 시야를 흐리는 것조차,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