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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Sep 04. 2020

물세탁, 해보기나 했어?

일단 태풍이 지나갔다.


술래가 지나갈 때 까지 숨어있었다는 듯이 가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슬 가을 옷을 준비해야겠군” 하고 옷장을


열었다. 심각한 냄새가 났다.


긴 장마와 태풍이 지나가는 사이-아마도 더 긴 시간- 옷에 초록색 곰팡이가 피어난 것이다.


그것도 왕년에 옷에 돈 좀 쓰던 시절에 비싸게 주고 산 


왁스 칠이 된 바버 재킷과 가죽 라이더 재킷이 엉망이 된 것이다.


두 제품 모두 관리와 세탁만 해도 유튜브와 포털 검색 결과를 가득 채울 정도로 이야기가


많은 녀석이다.


물세탁은 절대 안 된다, 평생 세탁 없이 입어야 한다, 리 왁싱, 드라이클리닝도 못 믿는다 등등 


도시락 싸 들고 바버 재킷과 가죽 재킷의 세탁을 말리는 이들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검정이 이어야 할 바버 재킷과 라이더 재킷이 온통 초록색 곰팡이로 뒤덮인 걸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곰팡이 핀 것에 마음이 아파 울컥한 게 아니다.


이 기분 나쁜 곰팡이를 옷이 망가진다는 이유로 드라이클리닝이라든지 젖은 헝겊 따위로 


‘살살’ 닦아 내야 한다는 등의 말에 반응한 것이다.


바위 위에 피어난 초록색 이끼 라면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입어야 할 옷이다.


한 유튜버가 물세탁을 반대하면서 그 제품을


어째서 ‘세탁’을 하려는 것이냐며 되려 훈계를 하는 것을 보고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더러워진 옷을 어설픈 방법으로 ‘살살’ 달래가면서 내 몸에 걸칠 생각은 없다.


나는 곧바로 바버 재킷과 라이더 재킷을 물세탁으로 돌렸다.


찬물에 세제와 함께 힘차게 세탁기 통 속을 헤엄치는 옷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했다.


물세탁이 되는 동안 얼음을 가득 넣은 유리잔에 코카콜라를 따라 마셨다.


검은색 코카콜라가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찰랑대고 있었다. 


세탁기 통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검은색 재킷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유튜버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속으로 말했다.


“당신은 손에 잉크나 기름때가 묻었는데 그때는 피부를 걱정해서 젖은 헝겊으로 ‘살살’ 닦아 낸다거나 


자신의 손을 마른하늘에 일광 건조를 충분히 한 후에 바싹 마른 입자를 떼어낸다거나 할 생각인가?”


나는 옷을 너무나도 애지중지 다루어야 한다는 그 생각이 싫었다. 


세탁기가 멈추고 재킷을 꺼냈다. 세탁 과정에서 구김이 생기긴 했지만, 

옷이 망가졌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초록색 곰팡이도 말끔히 사라졌다.


옷에 시중을 드는 것처럼 비굴하고 어설픈 


닦아내기 같은 게 아닌, 


세탁을 통해 비로소 입을 수 있는 


옷이 된 것이다.


바버 재킷과 라이더 재킷을 말리기 위해 바깥 행거에 걸어 두면서 정주영 회장의 말을 떠올렸다. 


“해보기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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