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3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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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일요일,
어우, 일기는 써야겠고 하루를 다 적으려니 시간이 엄청 걸릴 것 같고.. 눈은 무겁고, 그대로 자고 싶은데... 마켓에서 느꼈던 생각, 감정, 기억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봐 운을 조금씩 떼기 시작했다. 일기를 다 쓸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주던 남편도 나도 두시 반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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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요일은 늦잠이지.
눈을 떠보니 10시 반이었다. 부시시한 모습으로 거실에 나갔는데 엄마는 왜 이리 일찍 일어났냐는 반응이었다. 헤헤. 과일을 먹으면서 잔잔하게 보낸다. 곧 돌아온 점심시간. 엄마표 갈비와 잡채, 시원한 조개탕, 나물무침과 국물김치가 순식간에 차려졌다. 오늘 생일인 것처럼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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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도 별로 한 게 없다.
굳이 적어보자면 거실에 카페트를 깔고, 아빠의 부탁으로 고스톱 게임을 설치해드렸다. 우리집의 컴박사 이서방의 등장만으로 안 나오던 모니터가 갑자기 켜지고, 안 되던 인터넷이 작동된다. 아빠의 만족도는 오늘도 별점 다섯 개 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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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었으니 어김없이 찾아온 식곤증.
침대에 누워 천하태평처럼 폰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쿨쿨 잠든 우리. 잠깐일 줄 알았던 낮잠은 두 시간 넘게 기절하듯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그다음 일정은 저녁밥.. 정말 단조로운 일정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글을 적다니.. 넷이서 시내에 나가 산낙지볶음을 시켜먹었다. 안 매운데 매워서 콧물이 줄줄 흐른다. 매운데 안 매운 마성의 낙지볶음을 먹고 집에 돌아와 또 먹는 과일. 우리는 언제까지 먹을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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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면 엄마는 항상 메모지에 챙겨줄 것들을 적어놓으신다. 한 개라도 빼먹을세라 이번에도 메모지 한켠에 쓰인 글자들이 빼곡하다. 찰밥, 들깨죽, 멸치가루, 밑반찬, 국물김치, 간장이랑 청국장, 깎아놓은 밤 등 한가득 챙겨주셨다. 우리는 빈손으로, 빈 그릇만 들고 왔는데 헤헤헤..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감사히 잘 먹어야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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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하시는 아빠 엄마를 꼬옥 안아드리고 우리는 대구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들르는 밈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렛츠고. 잠을 충분히 잔 덕분에 똘망똘망한 상태로 두 시간을 달려올 수 있었다. 그러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학창 시절엔 수줍음이 많아서 ‘미뇽(피카츄에 등장하는 캐릭터)’같았다고 했더니, 우리가 연애를 하던 당시에 나는 ‘신뇽(미뇽에서 신뇽으로 진화함, 미뇽보다 더 예쁨)’같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럼 지금도 ‘신뇽’이냐고 물었더니.. ‘망나뇽’으로 대답을 하는 남편... 나 지금 망나뇽이야? 망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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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뇽이어도 좋다.
미뇽 신뇽이면 더 좋겠지만, 이게 뭐가 중요한가. 우리는 지금 부부이고, 알찬 주말을 보냈고, 가장 편하고 안락한 우리집에 왔고, 평화로운 밤을 보낼 테니까 망나뇽이어도 괜찮다. 오늘도 우리 모두의 평화를 찾는 밤. 피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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