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운명적인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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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토요일,
고택에서의 하룻밤.
따뜻하고 덥고 춥고 선선한 사계절을 느낀다. 자면서 들리는 새소리에 깨고, 다시 잠이 들어 꿈까지 꿨다. 동백나무에서 새들이 모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백나무는 아마 어제 본 드라마 장면이어서 나왔을 거라고 추측을 해 본다. 자연에 오니 새소리가 알람이 되는 현실.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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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햇살이 드리우는 가을날이었다.
피로에 숙취?에 조금은 더 흐릿한 모습으로, 날 것의 생김새로 하루를 시작했다. 잔다고 몰랐는데 고양이 소리, 앞 집의 공사 소리, 새소리, 마을 이장님의 방송 소리로 평소엔 한적하고 조용한 고택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고 했다. 나 잘 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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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조식을 기다리며 대청마루에 앉아서 고양이랑 인사를 나눈다. 치즈 둥이는 오늘도 사랑스러운 상태로 들이대고 귀여움을 뽐낸다. 토스트를 먹고 있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주는 사장님은 곧 따뜻한 차가 있는 공간으로 초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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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래쫄래 들어간 공간은 차 냄새가 느껴졌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차, 보이차를 계속 찻잔에 채워주신다. 마시기도 전에 바닥과 내 발에 뜨뜻하게 쏟아버리는 건 오늘의 이벤트. 차 한 잔에 수다 한 스푼. 점입가경 이야기로 빠져들면서 귀한 80년 차도 꺼내셨다. 그리고 옆방 손님들도 나란히 앉아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젯밤에 시끄럽게 떠들어서 미안하다며 귀여운 인사를 건네는 땅끝 손님들. 사장님과 손님들 사이를 가깝게 해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 주는 힘은 이토록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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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오래 앉아있었다.
오늘 자전거 타는 걸 포기할지 잠깐 고민도 했지만, 자전거를 꺼내서 마을 논밭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달린 길이랑은 너무나 다른 들녘길. 힘껏 페달을 밟았다가 멈춰서 사진을 찍는다. 바람 냄새를 맡고 가을 향기를 온몸으로 느껴본다. 끝없이 펼쳐진 누런 길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 농부들의 부지런함을 다시 깨닫곤 했다. 메뚜기, 나방, 억새, 코스모스, 배나무 등등 우리만의 가을체험현장은 아름다웠다. 우리만 걷던 핑크 뮬리 길도 예뻤지만, 그중에서 최고는 바람에 휘날리던 억새였다. 억새만 보면 왜 심장이 콩콩하는지. 나 가을 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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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을 달리고 식당에 갔다.
차와 자전거에 마음을 뺏겨 점심이 늦어졌다. 재첩국 정식, 청국장 정식, 재첩전 하나를 시켰다. 어른이 되고 갑자기 좋아진 재첩. 하동에 오면 생각나는 재첩을 이제는 주기적으로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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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숙소에 와서 짐을 풀었다.
동네 산책을 하고 도토리 구경을 하러 가는 길이 몹시 신났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방방방 기분 좋은 이숭이. 어미 고양이가 버리고 간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눈도 못 뜨고 털이 촉촉해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데 길가에 혼자 삐약삐약 거리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동네 고양이들이 잘 다니는 곳에 놔두고 관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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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때문에 가까이는 오지만 보살피지는 않았다.
이대로면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나름대로 SOS를 요청했다. 고양이 분유를 사들고 찾아온 천사 덕분에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부디 아기 고양이가 잘 버텨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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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해진 시간에 구례읍으로 나갔다.
우리가 종종 가는 카페는 이미 문을 닫았고, 가고 싶었던 돈까스 가게도 쉬는 날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메뉴가 많은 분식가게에 가기로 했다. 달걀 김밥, 매운 어묵김밥, 우동을 먹는다. 든든하게 먹고 동네 산책을 하다가 다시 숙소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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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등장하는 막걸리.
지평 생막걸리 한 병을 따서 과자랑 곁들여 먹었다. 남편은 꽈배기 과자를, 나는 뻥소리를 먹으면서 여독을 풀어본다. 뻥 과자가 속을 든든하게 채우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아까 사 온 로또를 숨죽여가며 번호를 맞춰보지만, 이내 종이 쓰레기로 변신하고 말았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철부지 두 사람. 비록 로또는 당첨되진 않았지만 당신이 로또라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10월의 어느 날. 우리는 여전히 멜로가 체질이고, 사랑이 넘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