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운명적인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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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 일요일,
아침 6시에 자다 깨서 처음 꺼낸 말. ‘나 배고파..’ 뭘 꺼내 먹기는 귀찮아 그냥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잤다. 9시에 일어나려고 일찍 잤는데.. 9시는 무슨.. 꾸물거리다 11시에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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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남편은 목공방에서 나무를 만지고 있었다.
자느라 뭘 하는지 못 봤지만 오늘도 진한 나무색 스테인을 슥슥 바르고 있다. 여러 겹을 발라서 원하는 색깔을 내는데 세 번은 조금 진한 것 같아서 두 번이 적당할 거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옆에서 뾱뾱이를 터뜨려야 제 맛인데 늦잠 때문에 패스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며칠 전 생신파티를 하고 남은 음식들이 있어서 간편하게 차릴 수 있었다. 남편이 가스레인지를 맡아서 국을 데우고 오리고기를 굽는 동안에 나는 팥밥이랑 반찬들을 꺼냈다. 한상 가득 먹고 한상을 깨끗이 비운 우리는 오늘도 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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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얼음도 원두도 없어서 드립백을 꺼내서 내리기로 했다. 남편이 설거지를 할 때 혼자 어슬렁어슬렁 마트에 가서 얼음 한 봉지를 사 왔다. 다른 과자들에 눈이 돌아갈 뻔했지만 추가로 건전지만 산다. 커피 향 솔솔,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밀감들. 영화보기 딱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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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돈’을 보고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하고 문이 닫히는데 내 입꼬리는 점점 올라간다. 오예. 자유시간이 생겼다. 뭘 할지 고민하다가 캔맥주랑 바나나킥을 꺼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을 틀었다. 제목을 많이 들어봤고 로맨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건축물과 공간이 주는 분위기, 관계, 외로움의 감정들을 잘 풀어냈다. 생각하게 하는 대사들도 많고, 무엇보다 영상을 담아내는 구도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월리가 뭘 나타내려는지 궁금했었는데 엔딩에서 알게 된다. 집에 있는 월리 책을 다시 꺼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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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시는 맥주가 때론 맛있게 느껴진다.
혼자 마음껏 먹는 과자가 양으로나 맛으로나 좋을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그랬다. 잘 먹어놓고선 이렇게 적으면 맥주랑 바나나킥이 배신감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히히. 같이 먹는 음식이, 같이 보는 영화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더 즐겁다. 그래도 평화로운 일요일이었고 남편이랑 다정한 시간도 보냈다. 영화, 음악, 책이랑 함께하는 하루여서 행복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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