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 이숭이의 하루

늘, 운명적인 타이밍

by 이숭이

_
_
2월 15일 토요일,
늦잠과 여유가 공존하는 아침.
8시 30분, 남편은 카트에 짐을 싣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부릉이 엔진오일을 직접 갈아볼 계획이란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DIY 세계의 대명사. 지난번에 목공놀이로 차량용 램프(경사로)를 만들어 차를 들어 올리고, 혼자서 엔진오일을 교체한 적이 있는 아주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오늘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
돌아오기로 한 12시.
작업이 늦어지나 보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어보니, 혼자서 스펙타클했던 DIY 활동. 엔진오일을 뺀다는 게 미션오일을 빼서 자동차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했다. 기어가 안걸렸다고라고라. 결국 견인을 불러서 카센터까지 가서 해결하고 왔단다. 마음고생+시간+비용 발생. DIY인 듯 DIY 아닌 DIY 같은... 다행이다. 고생했어요.
.
갑자기 시내에 나가게 됐다.
봉산 문화거리와 동성로 입성. 토스트를 먹으려다 유가네 닭갈비 앞에서 멈춘 우리. 저번에 먹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는지, 갑자기 점심 메뉴가 바뀌었다. 나는 약 10년, 남편은 약 15년 정도만에 오는 이 곳. 옛 기억을 더듬어 철판닭갈비 두 개랑 치즈 두 개, 라면사리를 시켰다. 밑반찬을 먹으면서 오매불망 기다린다. 철판을 보는 순간 둘 다 3초 정도 멈췄다. 정적, 그리고 깨달았다. 아, 우리는 닭갈비가 아니라 볶음밥을 시켰구나.. 웃기고 멋쩍고 당황스러운 유가네 철판닭갈비 시트콤이다.
.
동성로에 오면 눈이 돌아간다.
화장품, 옷가게, 소품샵, 문방구 등 자동문인 듯 들락날락거렸다. 미세먼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도 동성로엔 사람들로 꽉 찼다. 마스크를 쓴 사람 반, 안 쓴 사람 반. 오늘따라 봄 날씨 같아서 마스크 주변으로 턱이랑 인중에 땀이 찬다. 바깥은 19도. 잊고 있었던 대구의 여름이 생각났다. 아.
.
집숭이는 밖에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다.
한 번 나오면 다시 집에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가게 인테리어, 간판, 사람들, 물건들을 보면서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성에 찰 정도로 놀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동성로는 언제 와도 재미있는 곳, 바쁨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남편과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나. 붓펜을 산다길래 교보문고 핫트랙스에 들렀다 마트에 갔다. 장을 보다가 딸기가 덜 싱싱해서 굳이 시장에 가고, 다른 마트까지 가는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우리. 제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거의 12시간 만에 집에 온 남편.
후다닥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갰다. 후다닥 씻고 나와서 여유로운 토요일 밤을 보내는 우리. 처갓집 양념통닭을 시켜서 굶주린 배를 달래는 밤. 오늘 영화는 ‘기생충’. 다시 봐도 충격적이고 놀랍고, 재미있고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백조의 호수는 하루 종일 음악이 맴돌았다. 우리집 발레리노의 발레 영상을 보면서 킥킥거리는 밤. 한 번 보면 다섯 번은 보는 것 같다. 잠들기 전까지 또 봐야지. 모두들 굿나잇.
_

작가의 이전글20200214 이숭이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