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에서 질문하는 광장으로

열린신앙에 대한 네개의 시리즈중 세번째

by 김병태

AI, 제2의 인쇄술이 되어 '질문하는 평신도'의 시대를 열다

16세기,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찍어내던 인쇄소를 떠올려 봅니다.
그의 인쇄술은 성경을 성직자의 서가에서 끌어내어, 평범한 사람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책 한 권을 필사하는 데 두 달이 걸리던 시대에서, 일주일 만에 수백 권을 인쇄할 수 있는 시대로 옮겨간 것이지요.
그 변화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유럽 전역으로 퍼뜨리며, 중세의 종교 지형을 뒤흔든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2026년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문턱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인쇄기가 아니라,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 속에 있는 AI입니다.
저는 이 기술이 “제2의 인쇄술”이라고 불릴 만큼, 신앙의 풍경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강단만 말하고, 성도는 듣기만 하던 시대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은 일방적으로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설교자의 언어는 성역처럼 여겨졌고, 성도는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의문이 생겨도, “그렇게 묻는 건 믿음이 없는 거야”라는 말 한마디에 질문을 삼켜야 했습니다.

주일 예배가 끝난 뒤, 성도에게 허락된 복습은
설교 노트를 다시 읽으며 “맞다, 그대로 믿어야지”라고 되뇌는 것 정도였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고, 서로 다른 이해를 나누고,
설교자의 해석을 조심스럽게 검증해 보는 문화는 거의 자라지 못했습니다.

사유의 주권을 되찾는 작은 도구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손에 쥔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설교에서 인용된 성경 본문을 여러 번역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저 구절, 원래 그런 뜻이었나?”라는 질문이 떠오르면,
AI에게 묻고, 관련된 주석과 역사적 배경,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건 목회자를 시험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내 믿음을 더 책임 있게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강단이 독점하던 지식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성도들이 신앙의 문제를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사유의 주권 회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신앙의 질문에 대해, 더 이상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는 왜 그렇게 믿는가”를 천천히 되짚어 보는 과정입니다.

오염된 언어를 거르는 새로운 필터

물론, AI가 완전한 진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설교자의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이나
이단적 주장과 전통적인 가르침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필터가 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성경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제 한 번 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 그 구절이 그런 맥락에서 쓰였는지,
다른 교단과 신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과거라면 “목사님이 그러시니까”로 끝났을 질문이,
지금은 “그 말이 예수의 복음과 맞는지 한 번 더 살펴 보자”는 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술은 설교자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아니라,
오염된 언어를 정화하고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돕는 정수기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플랫폼 위에 세워지는 ‘열린 교회’

디지털 플랫폼을 중심으로 작은 실험들이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성경을 함께 읽고, 서로의 질문을 나누는 모임들,
전문 신학자와 평신도가 댓글과 라이브 방송으로 만나
복잡한 주제를 함께 풀어가는 시도들이 그렇습니다.

그곳에서는 “질문이 많아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질문이에요”라는 말이 가장 자주 들리는 인사입니다.
누군가의 ‘거룩한 의심’이 또 다른 이의 깨달음이 되고,
집단지성이 예수의 삶과 말씀을 더 입체적으로 비추어 줍니다.

저는 이런 흐름이,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
“전달되는 신앙”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신앙”으로
교회의 무게중심을 조금씩 옮겨 갈 것이라 기대합니다.

좀비에서 제자로: 울려야 할 오래된 종

AI는 목회자를 대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멈춰 있던 100년 된 종을 다시 울리는 망치에 가깝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좀비 교인’을 깨워,
스스로 묻고, 찾아보고, 분별하는 사유하는 제자로 부르는 초대장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그랬듯,
AI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억압의 도구가 될 수도,
아니면 자유와 개혁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질문을 금지하는 폐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묻고, 함께 배우며,
더 책임 있는 믿음으로 자라가는 열린 신앙 말입니다.

“제2의 인쇄술” 앞에 서 있는 이때,
우리 각자가 먼저 작은 질문 하나를 꺼내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오래전에 멈춰버린 종을 다시 울리는
첫 번째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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