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

사순절에 8복에 대해 생각해본다.

by 김병태

밴쿠버의 금요일 아침, 팔복의 다섯 번째 복이 떠오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 ‘안됐다’는 마음이 사라지는 시대

요즘 세상을 보면, 서로에게 “안됐다”라고 말해 줄 여유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흔들리고,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실패와 상처 앞에서 연민을 느끼기보다
“나도 버티기 힘든데, 저 사람은 왜 제대로 못 사나”라는 냉소가 먼저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회 곳곳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기존 시스템을 이용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는 불신이 퍼져 나가면서,
약자를 향한 시선이 연민보다 분노와 피로감에 더 가까워지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럴수록,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 삶도 벅찬데,
타인의 아픔까지 품어야 한다는 말이
버거운 요구처럼 다가올 때가 있지요.

2. 버스정류장에서 본 작은 여유

어제 인스타그램에서 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밴쿠버의 어느 버스 정류장,
휠체어를 탄 한 승객을 태우기 위해
버스 기사가 직접 내려와 여러 장비를 조정하며 돕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이 꽤 오래 걸렸는데,
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채는 사람도, 짜증을 내는 사람도 없이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요.

그 영상 아래에는 한국인들의 댓글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여유가 없어서 저걸 못 기다려 준다.”
“예전엔 시설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진짜 문제는 ‘마음의 여유’였다.”

라는 글들을 읽으며,
저도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떠올랐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선배들,
집을 구할 때 보증을 서 준 잘 알지도 못하던 이,
의료보험이 없던 어머니를
아무 조건 없이 치료해 준 패밀리 닥터까지.

‘시스템’이 나를 도와준 것도 있지만,
결국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됐다라는 마음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3. 내 삶 속에 쌓인 긍휼의 추억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많은 긍휼을 입으며 살아왔습니다.

– 언어도 문화도 서툴던 이민 초기,
공항에서 “잘 왔다”고 웃어준 선배들의 얼굴.
–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나를 처음 알았음에도 기꺼이 보증을 서 준 사람.
– 의료보험이 없어 난감했던 상황에서,
“그냥 치료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던 의사의 목소리.

이런 기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집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들이 내게 베푼 친절이
얼마나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었는지,
얼마나 귀한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었는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동이 된 모습”이었다는 것을요.

그래서인지,
나도 누군가를 보며 안됐다라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게라도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집니다.


큰일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받았던 긍휼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4. 긍휼의 선순환: “나도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는 자각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들이 언젠가 하나님께로부터도 긍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긍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정이 아니라,
“나도 약하고,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는
기억에서 비롯되는 감정입니다.

내가 이미 많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할수록,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조금 덜 얄밉게 보이고,
조금 더 안쓰럽게 보이게 됩니다.

안됐다라는 마음이 그때부터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퍼져 나갑니다.

누군가의 작은 양보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여유를 낳고,
그 여유가 다시 또 다른 친절로 이어지는 것.
이 선순환이 바로,
오늘의 복이 세상 속으로 번져 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5. 오늘 하루,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기도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먼저
당신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임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가진 것, 누리는 것,
이곳에서 누렸던 친절의 기억들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누군가를 보며
‘안됐다’라는 마음이 스치고 지나갈 때,
그 마음이 그냥 감정으로 끝나지 않도록
작은 행동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은
세상의 모든 불의를 다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 눈앞의 한 사람을 향해
내가 받은 긍휼을 조금 나누어 주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안됐다”라는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것,
그 마음이 퍼져 나가도록
작게라도 행동해 보려는 것.

그 길을 함께 걸어 가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의 팔복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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